사유 능력의 탄생과 고갈: 인간은 어떻게 생각하지 않는 존재가 되는가 - 2부¶
왜 인간은 사유하지 않은 채 행동하는가¶
핵심 요약¶
1부가 아리스토텔레스의 가능성과 현실성 개념을 통해 인간을 “사유할 수 있는 잠재성의 존재”로 설명했다면, 2부는 그 가능성이 왜 실제 행위 속에서 작동하지 않는지를 묻는다. 인간은 생각할 수 있지만 늘 생각하지 않는다. 인간은 판단할 수 있지만, 많은 경우 판단을 관습, 명령, 규칙, 분위기, 조직의 언어에 맡긴다. 한나 아렌트가 ‘사유 없음’이라는 말로 붙잡은 문제는 바로 이 지점이다. 사유 없음은 지능의 결핍이나 정보의 부족만을 뜻하지 않는다. 그것은 자신이 하는 일의 의미를 스스로 묻지 않는 상태, 자기 행위를 타인의 언어와 제도의 절차 속에 흘려보내는 상태다.
아렌트에게 사유 없음은 단순한 개인적 게으름이 아니다. 그것은 현대적 악과 책임의 문제를 이해하는 핵심 통로다. 인간은 악마적 의도 없이도 파괴적 체계에 가담할 수 있다. 명령을 따랐고, 절차를 지켰고, 자기 임무만 수행했다고 말하는 사람은 자기 행위를 스스로 판단하지 않은 채 세계에 영향을 미친다. 이때 문제는 그 사람이 생각할 능력이 전혀 없었다는 데 있지 않다. 문제는 생각할 수 있었음에도 생각하지 않았다는 데 있다.
사유할 수 있다는 것과 사유한다는 것은 다르다¶
1부의 결론은 인간에게 사유의 잠재성이 있다는 것이었다. 아리스토텔레스식으로 말하면 인간은 이성적 활동의 가능성을 가진 존재다. 그러나 가능성은 자동으로 현실성이 되지 않는다. 눈이 볼 수 있는 기관이라고 해서 항상 보고 있는 것이 아니듯, 인간이 사유할 수 있는 존재라고 해서 항상 사유하는 것은 아니다. 사유 능력은 보유될 수 있지만, 실제 사유는 행사되어야 한다.
이 구분은 아렌트의 문제의식으로 이어진다. 아렌트가 주목한 것은 인간이 악을 행할 때 반드시 깊은 악의, 강렬한 증오, 비범한 광기를 품고 있는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 사람은 평범한 언어, 평범한 업무, 평범한 규칙 준수 속에서도 끔찍한 결과에 가담할 수 있다. 이때 행위자는 자신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 절차적으로는 알 수 있다. 그는 서류를 처리하고, 명령을 전달하고, 보고서를 작성하고, 정해진 역할을 수행한다. 하지만 그 행위가 세계 안에서 어떤 의미를 갖는지 묻지 않는다.
여기서 사유 없음은 무지와 다르다. 무지는 알지 못하는 상태다. 사유 없음은 알고 있거나 알 수 있음에도 의미를 묻지 않는 상태다. 무능과도 다르다. 무능은 할 수 없는 상태다. 사유 없음은 할 수 있음에도 하지 않는 상태다. 인간은 이성적 잠재성을 지니지만, 그 잠재성이 행위의 순간에 작동하지 않으면 외부 질서에 끌려가는 존재가 된다.
따라서 2부의 질문은 “인간은 왜 어리석은가”가 아니다. 더 정확한 질문은 이것이다. 인간은 왜 생각할 수 있으면서도 생각하지 않는가. 왜 자기 행위의 의미를 묻지 않고, 이미 주어진 언어와 명령과 역할을 그대로 반복하는가. 왜 사유의 잠재성은 현실성으로 전환되지 못하고, 인간은 자기 행위의 주체가 아니라 체계의 기능자가 되는가.
아렌트의 ‘사유 없음’은 지능 부족이 아니다¶
한나 아렌트의 ‘사유 없음’ 개념은 『예루살렘의 아이히만』과 『정신의 삶』을 함께 놓고 읽을 때 분명해진다.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에서 아렌트는 나치 전범 아돌프 아이히만을 관찰하며 그가 괴물적 천재나 악마적 인물이라기보다, 상투어와 관료적 언어 속에서 자기 행위를 정당화하는 평범한 인물처럼 보였다고 분석했다. 이 논의에서 유명해진 표현이 ‘악의 평범성’이다.
악의 평범성은 악이 사소하다는 뜻이 아니다. 악이 평범하다는 말은 끔찍한 결과가 때로는 비범한 악인의 내면에서가 아니라, 평범한 사람들이 생각하지 않고 역할을 수행하는 과정에서 발생할 수 있다는 뜻이다. 이 점을 오해하면 아렌트의 논지를 놓치게 된다. 아렌트는 악을 가볍게 만들지 않는다. 오히려 악의 발생 조건을 더 불편한 곳으로 옮긴다. 악은 예외적 괴물에게만 맡겨 둘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사유를 멈춘 평범한 행위자도 악의 장치가 될 수 있다.
아렌트가 말한 사유 없음은 낮은 지능이 아니다. 아이히만은 자신이 맡은 행정적 업무를 수행할 정도의 능력과 언어를 갖고 있었다. 문제는 그가 자기 행위의 의미를 독립적으로 사유하지 않았다는 데 있다. 그는 명령, 법, 충성, 직무, 출세, 조직의 언어 안에서 자신을 설명했다. 그의 말은 자주 상투적 표현으로 채워졌고, 그는 자기 언어를 통해 세계를 새롭게 판단하기보다 이미 주어진 문구를 반복했다.
사유 없음은 언어의 문제와 깊게 연결된다. 인간은 언어로 생각한다. 그런데 언어가 자기 판단의 도구가 되지 못하고, 남들이 쓰는 문구를 자동으로 반복하는 장치가 되면 사유는 약화된다. “나는 명령을 따랐을 뿐이다”, “규정대로 처리했다”, “내 역할은 거기까지였다”, “그때는 모두 그렇게 했다” 같은 말은 단순한 변명이 아니다. 이런 말은 행위자가 자기 행위를 자기 언어로 판단하지 못하고, 제도와 집단의 언어 뒤로 숨어 들어가는 방식이다.
이때 인간은 생각하지 않는 존재가 된다. 그는 말을 하지만 사유하지 않는다. 설명하지만 판단하지 않는다. 행동하지만 자기 행위의 의미를 책임지지 않는다. 아렌트에게 사유 없음은 바로 이런 상태다. 그것은 머리가 비어 있는 상태라기보다, 남의 언어로 가득 차 있어 자기 판단이 들어설 자리가 없는 상태에 가깝다.
사유는 내면의 독백이 아니라 판단의 중지선이다¶
아렌트에게 사유는 단순한 지식 축적이 아니다. 사유는 세계와 자기 자신 사이에 거리를 만드는 활동이다. 어떤 명령이 주어졌을 때, 어떤 분위기가 나를 압박할 때, 어떤 규칙이 이미 정해져 있을 때, 사유는 그 흐름을 잠시 멈추게 한다. “나는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가”, “이 행위는 누구에게 어떤 결과를 낳는가”, “내가 따르는 말은 정말 나의 판단인가”라는 질문이 생길 때 인간은 자동 반응에서 벗어난다.
이 점에서 사유는 행위의 속도를 늦춘다. 사유하는 인간은 즉각 반응하지 않는다. 그는 멈추고, 거리 두고, 자기 자신에게 질문한다. 이 멈춤은 단순한 지체가 아니다. 그것은 행위가 맹목적 절차로 흘러가지 않게 막는 중지선이다. 인간이 사유할 수 있다는 것은 외부 자극과 내부 충동 사이에 질문의 틈을 만들 수 있다는 뜻이다.
사유 없음은 이 틈이 사라진 상태다. 명령이 곧 행위가 되고, 규칙이 곧 판단이 되며, 분위기가 곧 선택이 된다. 행위자는 자신이 결정했다고 생각하지만 실제로는 이미 주어진 경로를 따라간다. “다들 그렇게 한다”는 말은 이 상태를 잘 보여 준다. 이 말은 개인이 스스로 판단했다는 증거가 아니라, 판단을 집단의 관성에 맡겼다는 신호다.
아렌트가 말하는 사유는 전문 철학자의 사색만을 뜻하지 않는다. 일상적 행위자가 자기 행위의 의미를 묻는 능력도 사유다. 공무원이 문서를 처리할 때, 기업 직원이 알고리즘 정책을 집행할 때, 군인이 명령을 받을 때, 시민이 여론에 참여할 때, 사용자가 플랫폼에서 누군가를 공격할 때, 그 사람은 자기 행위가 세계 안에서 어떤 결과를 낳는지 물을 수 있다. 이 질문이 작동할 때 인간은 행위자가 된다. 이 질문이 사라질 때 인간은 기능자가 된다.
행위자는 어떻게 기능자로 축소되는가¶
현대 사회에서 사유 없음이 강력해지는 이유는 인간이 거대한 조직과 절차 속에서 부분 기능으로 배치되기 때문이다. 한 사람이 전체 결과를 직접 만들지 않는다. 그는 작은 단계 하나를 맡는다. 문서 하나를 승인하고, 데이터 하나를 입력하고, 명령 하나를 전달하고, 정책 하나를 적용한다. 각 단계는 사소해 보인다. 그래서 행위자는 자신이 전체 결과에 책임이 없다고 느낀다.
이 분업 구조는 책임의 감각을 약화시킨다. 전체 결과는 모두의 행위로 만들어지지만, 각 개인은 자기 몫이 너무 작다고 생각한다. “나는 결정권자가 아니었다”, “나는 시스템의 일부였을 뿐이다”, “나는 주어진 업무를 처리했을 뿐이다”라는 말은 이 구조에서 나온다. 책임은 위로 올라가고, 옆으로 퍼지고, 제도 속으로 사라진다. 결국 아무도 자신을 행위의 중심으로 느끼지 않는다.
아렌트의 관점에서 이것은 매우 위험한 상태다. 인간이 기능자로 축소되면 자기 행위를 판단하는 능력이 약해진다. 기능자는 목적을 묻지 않는다. 기능자는 절차를 수행한다. 기능자는 전체 의미를 따지지 않고 자기 역할의 정확성만 본다. 이때 효율성, 충실성, 성실성 같은 덕목도 위험해질 수 있다. 나쁜 체계 안에서 성실한 기능자는 더 큰 파괴를 더 매끄럽게 수행할 수 있기 때문이다.
여기서 핵심은 성실성이 나쁘다는 말이 아니다. 성실성은 판단과 결합될 때 덕이 된다. 판단 없는 성실성은 체계의 속도를 높이는 힘이 될 수 있다. 사유 없는 복종은 무능한 반항보다 위험할 때가 있다. 무능한 반항은 체계를 방해하지만, 사유 없는 복종은 체계를 완성한다. 따라서 행위자의 윤리적 문제는 단순히 “맡은 일을 잘했는가”가 아니라 “그 일이 어떤 세계를 만드는지 물었는가”에 있다.
상투어는 사유의 대체물이다¶
아렌트가 아이히만에게서 본 중요한 특징 중 하나는 상투어의 반복이었다. 상투어는 이미 굳어진 말이다. 그것은 생각을 대신해 준다. 복잡한 현실을 직접 판단하지 않아도, 이미 사회적으로 유통되는 문구를 가져와 말하면 된다. “법은 법이다”, “조직은 조직이다”, “현실적으로 어쩔 수 없다”, “나는 내 일을 했을 뿐이다” 같은 말은 판단을 단순화한다.
상투어가 위험한 이유는 언어의 형식을 띠고 있으면서 사유를 멈추게 만들기 때문이다. 사람은 상투어를 말할 때 자신이 설명하고 있다고 느낀다. 하지만 실제로는 설명해야 할 문제를 이미 닫아 버린다. “어쩔 수 없었다”는 말은 무엇이 불가피했는지 따지는 질문을 막는다. “다들 그렇게 했다”는 말은 왜 그것이 정당한지 묻는 질문을 막는다. “규정대로 했다”는 말은 규정과 책임의 관계를 묻는 질문을 막는다.
사유는 언어를 필요로 하지만, 모든 언어가 사유를 낳지는 않는다. 어떤 언어는 사유를 열고, 어떤 언어는 사유를 닫는다. 질문하는 언어는 사유를 연다. 상투어는 사유를 닫는다. 질문하는 언어는 구체적 상황을 다시 보게 만들지만, 상투어는 상황을 이미 정해진 틀 안에 넣는다. 이때 인간은 세계를 판단하는 것이 아니라, 세계를 이미 익숙한 말에 맞추어 처리한다.
이 문제는 현대 사회에서도 반복된다. 우리는 정치적 구호, 기업의 관리 언어, 플랫폼의 추천 문구, 여론의 밈, 자기계발의 문장, 집단 정체성의 표어를 통해 생각을 대체한다. 말은 많아지지만 사유는 줄어들 수 있다. 표현은 풍부해지지만 판단은 빈약해질 수 있다. 어떤 사람은 자기 의견을 말한다고 생각하지만, 실제로는 자신이 속한 집단의 문장을 반복한다. 사유 없음은 침묵이 아니라 과잉 발화 속에서도 생긴다.
사유 없음은 책임의 공백을 만든다¶
사유 없음이 중요한 이유는 그것이 책임의 공백을 만들기 때문이다. 인간은 자기가 한 일을 이해하고 판단할 수 있을 때 책임 있는 행위자가 된다. 책임은 단순히 결과를 떠안는 법적 절차만이 아니다. 책임은 자기 행위를 자기 것으로 인식하는 능력이다. “내가 했다”, “내가 따랐다”, “내가 침묵했다”, “내가 묻지 않았다”라고 말할 수 있어야 책임이 시작된다.
사유 없는 행위자는 이 문장을 회피한다. 그는 자기 행위를 외부 요인에 분산시킨다. 명령이 시켰고, 규칙이 요구했고, 조직이 결정했고, 시대가 그랬고, 모두가 그렇게 했다고 말한다. 이런 말들은 때로 실제 조건을 설명한다. 인간은 언제나 완전히 자유로운 진공 속에서 행동하지 않는다. 강제와 위협과 제도적 압력은 실제로 존재한다. 하지만 조건이 존재한다는 사실이 판단의 완전한 부재를 정당화하지는 않는다.
아렌트의 문제의식은 바로 이 긴장에 있다. 인간은 조건 속에서 행동하지만, 조건과 자기 행위 사이에 아무 틈도 없다고 말할 수 없다. 그 틈이 사유의 자리다. 인간은 모든 것을 바꿀 수 없지만, 자신이 무엇에 가담하고 있는지 물을 수는 있다. 모든 명령을 거부할 수 없을지라도, 명령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판단할 수는 있다. 모든 체계 밖으로 나갈 수 없을지라도, 체계의 언어를 그대로 자기 언어로 받아들이지 않을 수는 있다.
사유 없음은 이 최소한의 틈을 제거한다. 그러면 인간은 자기 행위의 저자가 아니라 전달자가 된다. 그는 명령을 전달하고, 규칙을 적용하고, 분위기를 확산시키고, 혐오를 재생산하고, 폭력을 정상화하지만, 자신은 아무것도 시작하지 않았다고 느낀다. 여기서 책임의 공백이 생긴다. 모두가 움직였지만 아무도 행위하지 않은 것처럼 보이는 상태, 결과는 발생했지만 주체는 사라지는 상태가 만들어진다.
판단은 사유의 정치적 형태다¶
아렌트에게 사유는 내면적 활동에 머물지 않는다. 사유는 판단으로 이어질 때 정치적 의미를 갖는다. 판단은 구체적 상황에서 무엇이 옳고 그른지, 무엇이 허용될 수 있고 무엇이 거부되어야 하는지를 분별하는 능력이다. 판단은 추상 원칙만으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그것은 특정한 상황, 특정한 사람들, 특정한 결과를 고려해야 한다.
사유 없는 인간은 판단을 외부 기준에 맡긴다. 법이 그렇다면 옳고, 상사가 시켰다면 해야 하며, 다수가 원한다면 정당하다고 여긴다. 이때 판단은 규칙 적용으로 축소된다. 물론 규칙은 필요하다. 법과 절차는 인간 사회의 필수 조건이다. 문제는 규칙이 판단을 완전히 대신할 때 발생한다. 규칙은 행위를 안내할 수 있지만, 모든 상황의 의미를 스스로 말해 주지는 않는다.
판단은 규칙과 현실 사이의 간격에서 작동한다. 어떤 규칙이 적용되고 있을 때, 그 규칙이 실제로 무엇을 만들고 있는지 묻는 능력이 판단이다. 어떤 명령이 합법적으로 주어졌을 때, 그 명령이 인간과 세계에 어떤 결과를 낳는지 묻는 능력이 판단이다. 어떤 여론이 압도적일 때, 그 여론이 누구를 침묵시키고 누구를 배제하는지 묻는 능력이 판단이다.
이 판단 능력은 1부에서 말한 잠재성의 현실화다. 인간에게는 판단할 수 있는 가능성이 있다. 하지만 판단은 자동으로 일어나지 않는다. 판단은 훈련되어야 한다. 다양한 관점을 상상하고, 자기 언어를 의심하고, 타인의 고통을 구체적으로 인식하고, 집단의 문구에서 한 걸음 물러나는 습관이 필요하다. 판단은 지식의 양보다 사유의 활동성과 더 깊이 연결된다.
사유 없음은 악의 예외성이 아니라 평범성을 드러낸다¶
악을 예외적인 괴물의 문제로만 보면 우리는 안심할 수 있다. 악인은 우리와 전혀 다른 존재이고, 우리는 그런 사람이 아니라고 생각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아렌트의 논의는 이 안심을 허용하지 않는다. 악은 때로 평범한 삶의 규칙성, 성실한 업무 수행, 집단 언어의 반복, 자기 판단의 중지 속에서 발생한다.
이 말은 모든 사람이 악하다는 냉소가 아니다. 그것은 모든 사람이 사유 없음에 빠질 수 있다는 경고다. 인간은 잠재적으로 사유할 수 있지만, 잠재적으로 사유를 멈출 수도 있다. 인간은 판단할 수 있지만, 판단을 외부에 맡길 수도 있다. 인간은 책임질 수 있지만, 책임을 절차와 명령과 분위기 속에 흩어 버릴 수도 있다.
악의 평범성은 인간의 내면이 하찮다는 뜻이 아니다. 그것은 악의 발생 조건이 생각보다 일상적이라는 뜻이다. 악은 특별한 심연에서만 나오지 않는다. 그것은 “나는 시키는 대로 했다”는 문장, “내가 결정한 일이 아니다”라는 문장, “그때는 어쩔 수 없었다”는 문장, “다들 그렇게 했다”는 문장 속에서도 자란다. 이 문장들은 스스로를 방어하는 동시에 사유를 차단한다.
아렌트의 통찰은 그래서 불편하다. 그는 우리에게 악인을 멀리서 판단하라고만 요구하지 않는다. 그는 우리 자신의 언어와 습관을 보라고 요구한다. 내가 사용하는 말은 나의 판단인가. 내가 따르는 규칙은 내가 이해한 규칙인가. 내가 수행하는 역할은 어떤 결과를 낳는가. 내가 침묵하는 순간, 그 침묵은 어떤 체계를 돕는가. 이런 질문을 피할 때 인간은 사유할 수 있는 존재에서 생각하지 않는 기능자로 내려간다.
1부에서 2부로: 잠재성은 실패할 수 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관점에서 인간은 사유와 덕의 가능성을 지닌 존재다. 인간은 훈련과 습관을 통해 자기 가능성을 현실화할 수 있다. 이 관점은 인간에 대한 중요한 희망을 제공한다. 인간은 지금의 상태에 고정되지 않는다. 인간은 배울 수 있고, 더 나은 판단을 형성할 수 있으며, 자기 삶의 형식을 바꿀 수 있다.
아렌트는 이 희망의 어두운 면을 보여 준다. 가능성은 실패할 수 있다. 사유의 잠재성은 현실화되지 않을 수 있다. 판단 능력은 사용되지 않을 수 있다. 덕이 습관을 요구하듯, 사유도 습관을 요구한다. 질문하지 않는 습관, 상투어를 반복하는 습관, 권위에 판단을 맡기는 습관, 자기 행위를 작은 업무로만 보는 습관이 굳어지면 인간은 생각하지 않는 방식으로 살아간다.
따라서 2부의 핵심은 인간이 사유 능력을 잃어버린다는 것이 아니다. 더 정확한 문제는 인간이 사유 능력을 가지고도 사용하지 않을 수 있다는 점이다. 능력은 남아 있지만 활동하지 않는다. 잠재성은 있지만 현실성이 되지 않는다. 이 상태가 사유 없음이다.
이 구조는 책임의 문제를 더 엄격하게 만든다. 어떤 사람이 전혀 생각할 수 없는 존재라면 책임의 문제는 약해진다. 하지만 생각할 수 있는 사람이 생각하지 않았다면, 문제는 더 심각해진다. 사유 없음은 단순한 결핍이 아니라 방치된 가능성이다. 아렌트가 보여 준 위험은 바로 여기에 있다. 인간은 자신의 가장 인간적인 능력을 사용하지 않은 채, 매우 조직적이고 효율적인 방식으로 파괴에 가담할 수 있다.
2부에서 3부로: 사유 없음은 개인의 내면만으로 설명되지 않는다¶
여기서 한 가지 문제가 남는다. 인간이 사유하지 않는 이유를 개인의 게으름이나 도덕적 나약함만으로 설명할 수 있을까. 아렌트의 논의는 개인의 책임을 강조하지만, 현대 사회에서는 사유 없음이 개인의 내면만으로 생기지 않는다. 인간의 주의력, 시간, 감정, 판단력은 사회적 조건 속에서 형성되고 소모된다.
현대 시스템은 인간에게 끊임없이 반응하라고 요구한다. 플랫폼은 빠른 클릭과 즉각적 감정 표현을 유도한다. 노동 환경은 지속적인 성과와 응답을 요구한다. 정보 환경은 생각할 시간을 주기보다 다음 자극으로 밀어붙인다. 경제적 불안과 생활의 희소성은 장기적 판단보다 단기적 생존에 집중하게 만든다. 이런 조건에서 사유 없음은 개인의 결함이면서 동시에 시스템의 산물이 된다.
따라서 3부는 아렌트의 사유 없음 문제를 행동과학과 현대 시스템 분석으로 확장해야 한다. 인간은 생각할 수 있지만, 생각할 조건을 잃을 수 있다. 인간은 판단할 수 있지만, 판단에 필요한 인지적 대역폭이 고갈될 수 있다. 인간은 자기 행위를 돌아볼 수 있지만, 플랫폼과 조직과 경제적 압박이 계속 반응을 요구하면 사유의 중지선은 약해진다.
2부의 결론은 이것이다. 인간은 사유하지 않는 동물이어서 위험한 것이 아니다. 인간은 사유할 수 있는데도 사유하지 않을 수 있기 때문에 위험하다. 그리고 이 위험은 개인의 내면에서만 생기지 않는다. 사회가 인간에게 어떤 언어를 주고, 어떤 속도를 요구하며, 어떤 책임 구조를 만들고, 어떤 인지 조건을 강요하는지에 따라 사유의 잠재성은 현실화되거나 방치된다.
정리¶
한나 아렌트의 ‘사유 없음’은 인간이 생각할 능력이 없다는 말이 아니다. 그것은 인간이 자기 행위의 의미를 묻지 않고, 상투어와 명령과 규칙과 조직의 언어에 판단을 맡기는 상태를 가리킨다. 이 상태에서 인간은 행위자가 아니라 기능자가 된다. 그는 행동하지만 자기 행위의 의미를 자기 언어로 붙잡지 못한다. 그는 결과에 참여하지만 책임을 절차와 체계 속에 분산시킨다.
1부의 아리스토텔레스가 인간을 잠재성의 존재로 설명했다면, 2부의 아렌트는 그 잠재성이 실패할 때 어떤 윤리적·정치적 위험이 생기는지 보여 준다. 인간은 사유할 수 있기 때문에 존엄하다. 동시에 사유하지 않을 수 있기 때문에 위험하다. 사유 없음은 지능의 결핍이 아니라 현실화되지 않은 사유 능력의 문제다.
이제 3부의 질문이 열린다. 인간이 생각할 수 있음에도 생각하지 않는다면, 현대 시스템은 그 경향을 어떻게 강화하는가. 플랫폼, 노동, 정보 과잉, 경제적 희소성, 인지적 대역폭의 고갈은 인간의 사유 능력을 어떻게 잠식하는가. 3부는 이 질문을 통해 사유 없음의 문제를 개인 윤리에서 사회 시스템의 문제로 확장한다.
참고자료¶
- Hannah Arendt, Eichmann in Jerusalem: A Report on the Banality of Evil. 아이히만 재판과 ‘악의 평범성’ 논의.
- Hannah Arendt, The Life of the Mind. 사유, 의지, 판단의 정신 활동에 관한 논의.
- Hannah Arendt, Responsibility and Judgment. 책임, 판단, 도덕적 행위의 문제에 관한 글 모음.
- Hannah Arendt, The Human Condition. 행위, 노동, 작업, 공적 세계에 관한 논의.
- Immanuel Kant, Critique of Judgment. 아렌트의 판단론 이해에 중요한 배경이 되는 판단 개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