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워진 기억의 영수증¶
아침은 아무 일도 모른다는 얼굴로 시작되었다.
전기포트가 낮게 끓는 소리를 냈고, 싱크대에는 어젯밤 씻지 않은 컵 하나가 입을 벌리고 있었다. 민서는 냉동실에서 식빵 두 장을 꺼내 토스터에 넣고, 커피 필터를 접어 드리퍼에 끼웠다. 창밖에는 아직 마르지 않은 빗물이 방충망에 맺혀 있었다. 출근하기에는 조금 이른 시간이었다. 휴대폰 알람은 이미 꺼져 있었고, 집 안에는 혼자 사는 사람의 물건들이 각자의 위치에서 조용히 닳아가고 있었다.
민서는 세탁기 위에 놓아둔 바지를 집어 들었다. 어제 입었던 검은 바지였다. 주머니를 뒤집자 구겨진 종이 한 장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편의점 영수증처럼 얇고, 병원 처방전처럼 창백한 종이였다.
그는 처음에 그것을 쓰레기통에 넣으려 했다. 그런데 종이 위에 찍힌 글자가 눈에 들어왔다.
품목: 기억 3년 분량
결제 방식: 일시불
결제 금액: 가장 소중한 감정 하나
민서는 한동안 그 문장을 읽었다. 잘못 인쇄된 광고지일 수도 있었다. 어느 영화관의 이벤트 쿠폰, 혹은 술자리에서 누군가 장난으로 건넨 종이. 날짜는 어제였다. 시간은 23시 17분. 장소명은 없었다. 사업자등록번호도 없었다. 맨 아래에는 작은 글씨로 이렇게 적혀 있었다.
환불 불가.
구매자는 결제 사유를 기억하지 못할 수 있음.
커피 물이 끓어올랐다. 민서는 포트의 스위치를 내리고도 한참 움직이지 못했다. 식빵은 토스터 안에서 딱딱하게 구워지고 있었다. 그때 왼쪽 손목 안쪽이 따끔거렸다.
그는 소매를 걷었다.
손목에는 가느다란 흉터가 있었다. 붉은 선이 두 갈래로 갈라졌다가 다시 이어지는 모양이었다. 어제까지 없던 자국이었다. 상처라기보다 누군가 아주 작은 칼끝으로 문장을 쓰다 만 흔적 같았다. 흉터 아래, 검은 펜으로 쓴 듯한 글씨가 희미하게 남아 있었다.
그 애를 미워하지 마.
민서는 그 문장을 소리 내어 읽지 않았다. 대신 손목을 물에 씻었다. 글씨는 지워지지 않았다. 잉크가 아니라 피부 안쪽에서 올라온 색처럼 남아 있었다.
그 애.
누구를 말하는지 알 수 없었다.
민서는 출근하지 않았다. 회사 단체방에는 몸이 좋지 않다고 적어 보냈다. 답장은 곧바로 몇 개의 이모티콘으로 돌아왔다. 그는 휴대폰을 내려놓았다가 다시 집어 들었다. 통화 기록에는 모르는 번호 하나가 밤 11시 32분에 찍혀 있었다. 발신도 수신도 아니었다. 부재중 전화도 아니었다. 단지 번호만 남아 있었다.
문자함에는 삭제된 대화방 하나가 있었다. 이름은 없고, 회색 아이콘만 남아 있었다. 마지막 메시지는 어젯밤 11시 04분.
“정말 할 거야?”
민서는 그 위의 메시지들을 불러오려 했지만, 대화는 복구되지 않았다. 휴대폰은 친절하게도 삭제된 대화는 다시 표시할 수 없다고 알려주었다. 친절은 때때로 가장 차가운 형식이었다.
그는 책상 서랍을 뒤졌다. 보험 서류, 오래된 보증서, 병원 영수증들이 뒤섞여 있었다. 맨 아래에서 작은 흰 봉투가 나왔다. 봉투에는 자신의 글씨로 날짜 하나가 적혀 있었다.
5월 17일.
올해 달력을 펼쳐 보니 그 날짜만 유독 지워져 있었다. 다른 날짜들에는 회의, 치과, 부모님 기일 같은 말들이 적혀 있었는데, 5월 17일의 칸은 검은 펜으로 여러 번 칠해져 있었다. 너무 많이 덧칠해 종이가 조금 찢어져 있었다. 옆 달력에도, 전년도 다이어리에도 같은 날짜가 비어 있었다. 비어 있다기보다 누군가 일부러 파낸 것 같았다.
봉투 안에는 병원 영수증이 세 장 있었다. 정신건강의학과, 응급의학과, 그리고 장례식장 근처 꽃집 카드 결제 내역. 수취인은 모두 민서의 이름이었다. 병원 주소는 낯익었다. 그는 그 병원 앞을 지나다닌 적이 여러 번 있었다. 그 근처에 오래된 빌라촌이 있었고, 빌라촌 뒤에는 작은 하천이 흘렀다. 그런데 왜 낯익은지 설명할 수 없었다. 오래 산 동네도, 일한 곳도 아니었다.
봉투 맨 아래에는 사진 한 장이 들어 있었다.
사진 속 민서는 바닷가에 서 있었다. 겨울 바다였다. 코트 깃이 바람에 날렸고, 그의 옆에는 누군가의 어깨만 남아 있었다. 사진의 오른쪽 절반이 잘려 나간 것이 아니었다. 인화된 사진 한가운데가 하얗게 비어 있었다. 사람의 형상을 따라 종이가 탈색된 듯했다. 어깨선, 머리카락의 끝, 손목에 찬 얇은 팔찌의 일부만 남아 있었다. 그 사람이 누구였는지 사진은 끝까지 말하지 않았다.
민서는 사진 뒷면을 보았다.
살아 있으면, 데리러 가지 마.
그의 글씨였다.
그 문장은 이상했다. 살아 있으면 데리러 가야 할 것 같았다. 죽었으면 데리러 갈 수 없으니까. 그런데 그는 반대로 적어 두었다. 살아 있으면, 데리러 가지 마. 살아 있음이 곧 접근 금지의 이유라는 듯이.
그날 오후, 모르는 번호에서 전화가 걸려왔다. 민서는 몇 초 동안 화면을 바라보다가 받았다.
“여보세요.”
상대는 숨을 들이마시는 소리만 냈다. 아주 오래 울고 난 사람의 호흡이었다.
“민서 씨?”
목소리는 젊은 여자였다. 이름을 불렀지만 가까운 사람처럼 부르지는 않았다. 조심스럽고, 겁먹은 사람의 발음이었다.
“누구세요?”
침묵이 길어졌다. 민서는 그 침묵 속에서 상대가 무언가를 참고 있다는 것을 느꼈다. 울음인지, 분노인지, 말하지 않기로 한 약속인지 알 수 없었다.
“기억이 없구나.”
“누구세요.”
“미안해요. 전화하면 안 된다고 했는데.”
“무슨 말인지 모르겠습니다.”
“그럼 잘된 거예요.”
여자는 그렇게 말하고 전화를 끊었다.
민서는 곧바로 다시 걸었다. 받지 않았다. 번호를 검색해도 아무것도 나오지 않았다. 그는 병원 영수증의 주소를 검색했다. 버스로 네 정거장, 지하철로는 한 번 갈아타야 하는 거리였다. 그는 외투를 입고 집을 나섰다. 손목의 문장은 소매 안에서 천천히 달아오르는 것 같았다.
병원은 오래된 상가 건물 5층에 있었다. 접수대의 직원은 민서의 이름을 듣고 잠깐 눈썹을 움직였다. 예약은 없었다. 진료 기록도 보여줄 수 없다고 했다. 개인정보라는 말은 어떤 문 앞에서든 단단한 자물쇠가 되었다. 민서는 영수증을 내밀었다. 직원은 난처한 표정으로 안쪽 문을 바라보았다.
잠시 후 흰 가운을 입은 의사가 나왔다. 그는 민서를 알아보는 얼굴이었다.
“오셨군요.”
“제가 여기 다녔습니까?”
의사는 민서의 손목을 보았다. 민서는 무의식적으로 소매를 내렸다.
“기록상으로는 상담을 받으셨습니다. 하지만 제가 말씀드릴 수 있는 건 많지 않습니다.”
“제가 어제 뭘 했습니까?”
의사는 대답 대신 상담실 문을 열었다. 방 안에는 낮은 소파와 작은 탁자, 화분 하나가 있었다. 창가의 고무나무 잎은 먼지를 조금 뒤집어쓰고 있었다. 의사는 서랍에서 봉인된 봉투 하나를 꺼냈다.
“본인이 오면 전달해 달라고 하셨습니다. 단, 질문에 모두 답해주지는 말라고 하셨고요.”
봉투에는 민서의 글씨가 있었다.
네가 기억하지 못하면 읽어라.
그는 봉투를 열었다. 안에는 짧은 편지가 들어 있었다.
너는 지금 누군가를 찾고 있을 것이다.
찾지 않는 편이 좋다.
그래도 찾게 된다면, 그건 네 잘못이 아니다.
너는 늘 그런 사람이었다.
그 애 이름은 서윤이다.
너는 그 애를 사랑했고, 또 오래 미워했다.
둘 다 사실이다.
5월 17일에 일어난 일을 알고 싶어 하지 마라.
알게 되어도 너는 같은 곳으로 돌아가지 못한다.
우리가 치른 값은 기억이 아니라, 돌아갈 수 있다는 믿음이었다.
서윤이 살아 있다면, 데리러 가지 마라.
그 애가 살 수 있도록 네가 빠져나온 것이다.
편지는 거기서 끝났다. 설명이라 부르기에는 너무 많은 것을 비워 둔 문장이었다. 민서는 종이를 접지 못하고 한동안 들고 있었다.
“서윤이 누구입니까?”
의사는 긴 숨을 내쉬었다.
“제가 말할 수 있는 건 하나입니다. 그분은 여기에 입원한 적이 없습니다. 상담을 받으러 온 사람은 민서 씨였습니다. 매번 그분 이야기를 하셨고요.”
“제가 왜요?”
“그분이 살아 있는 것을 견디지 못한다고 했습니다. 동시에 그분이 죽을까 봐 밤마다 병원으로 뛰어갔다고 했습니다.”
민서는 말을 잃었다.
두 문장은 서로를 밀어내지 않았다. 오히려 너무 오래 붙어 살아온 문장처럼 들렸다.
병원을 나와 하천 쪽으로 걸었다. 겨울이 아니었는데도 바람은 차가웠다. 다리 아래에는 물비린내가 고여 있었다. 민서는 휴대폰 지도에 5월 17일을 검색하듯 입력했다. 당연히 아무 일도 나오지 않았다. 인터넷은 타인의 사건에는 지나치게 많은 것을 알고 있었고, 정작 한 사람의 생이 꺾인 자리에는 아무것도 남기지 않았다.
그때 문자 하나가 도착했다.
“오지 말라고 했잖아요.”
민서는 바로 답장을 보냈다.
“서윤 씨입니까?”
답장은 한참 뒤에 왔다.
“기억하지 못하면 그냥 살아도 돼요.”
민서는 화면을 바라보았다. 손끝이 차가워졌다.
“당신을 제가 구했습니까?”
이번에는 답장이 오지 않았다. 대신 사진 하나가 전송되었다.
낡은 빌라 옥상 문이었다. 문 위에는 녹슨 번호판이 붙어 있었다. 1603. 민서는 그 숫자를 보자마자 속이 비어지는 느낌을 받았다. 기억이 떠오른 것은 아니었다. 몸이 먼저 알아보는 장소들이 있다. 발바닥이, 손바닥이, 어깨가 기억하는 방향. 그는 택시를 잡았다.
빌라는 병원 뒤 골목 끝에 있었다. 16층짜리 낡은 건물은 주변 아파트들 사이에서 조금 기울어진 것처럼 보였다. 엘리베이터는 느리게 올라갔다. 13층에서 한번 멈췄고, 아무도 타지 않았다. 16층 복도는 형광등 하나가 깜박이고 있었다. 옥상 문은 잠겨 있지 않았다.
문을 열자 바람이 세게 밀려왔다.
옥상 난간 가까이에 여자가 서 있었다. 짧은 머리, 검은 코트, 왼쪽 손목의 얇은 팔찌. 사진 속 하얗게 지워진 자리에서 남아 있던 팔찌였다. 민서는 그녀가 서윤이라는 것을 알았다. 알았다는 표현은 부정확했다. 이름과 얼굴이 연결되는 느낌이 아니라, 오래전에 두고 온 물건을 길에서 다시 봤을 때의 이상한 침묵이 그를 지나갔다.
서윤은 돌아보았다.
그녀의 얼굴에는 민서가 기억하지 못하는 세월이 묻어 있었다. 잠을 오래 잃은 사람의 눈가, 사과를 너무 많이 해본 사람의 입술, 살아남은 일을 설명해야 했던 사람의 목소리.
“왜 왔어요.”
민서는 대답하지 못했다. 왜 왔는지 자신도 알지 못했다. 호기심, 의무감, 몸에 남은 습관. 그중 무엇도 충분하지 않았다.
“제가 당신을 사랑했습니까?”
서윤은 웃지 않았다. 우는 얼굴도 아니었다.
“그런 질문을 할 수 있는 사람이 됐네요.”
“제가 당신을 구했습니까?”
서윤은 난간에서 한 걸음 물러났다. 그 작은 움직임에 민서의 몸이 먼저 굳었다. 기억 없는 몸은 여전히 떨어지는 것을 두려워했다.
“당신은 나를 구하려고 한 게 아니었어요.”
“그럼요.”
“나를 벌하지 않으려고 했어요.”
바람이 두 사람 사이의 말을 흩뜨렸다. 서윤은 난간 아래를 내려다보지 않았다. 그녀는 민서의 손목을 보았다.
“그날 내가 운전했어요. 비가 왔고, 당신 동생이 뒤에 타고 있었어요.”
민서는 동생이라는 단어 앞에서 멈췄다. 자신에게 동생이 있었다는 사실이 아주 먼 곳에서 던져진 돌처럼 가라앉았다. 물결은 일었지만 바닥은 보이지 않았다.
“지안이.”
서윤이 이름을 말했다.
지안.
민서는 그 이름을 따라 입술을 조금 움직였다. 아무것도 열리지 않았다. 슬픔도, 그리움도, 충격도. 이름은 문 앞에 놓인 열쇠처럼 보였지만 문이 없었다.
“그 애는 죽었어요. 나는 살았고요. 당신은 나를 사랑했지만, 그 뒤로 나를 볼 때마다 무너졌어요. 내가 무너지는 것도 봤고요. 나는 계속 죽으려고 했어요. 당신은 나를 붙잡으면서도, 내가 사라지면 편해질 거라고 말한 적이 있어요.”
서윤의 목소리는 비난처럼 들리지 않았다. 오래 보관한 사실을 꺼내는 소리였다. 그 사실은 상하지 않았지만, 누구도 먹을 수 없는 음식처럼 차가웠다.
“어제 나는 다시 여기 있었어요. 당신이 올라왔고요. 나는 더는 못 하겠다고 했어요. 내가 지안이를 죽였다는 기억, 당신이 나를 사랑했던 기억, 당신이 나를 미워하는 얼굴까지 다 가지고 살 수 없다고 했어요.”
민서는 영수증을 꺼냈다. 종이는 주머니 안에서 조금 구겨져 있었다.
“그래서 제가 팔았군요.”
서윤은 고개를 저었다.
“내가 팔려고 했어요. 내 3년을. 그 기억들을 지우려고. 그러면 지안이는 두 번 죽는 거라고 당신이 말했어요. 아무도 기억하지 않게 되는 거라고.”
“그래서 제가 대신.”
“당신은 내 기억을 지우지 말라고 했어요. 고통이 사라지면 죄도 사라지는 것처럼 살게 될까 봐 무섭다고 했어요. 대신 당신이 지불했어요. 지안이와 나와 당신이 함께 있었던 3년. 내가 당신을 사랑했고, 당신도 나를 사랑했고, 지안이가 우리를 놀렸던 시간들. 당신이 잃으면 나는 죽지 않을 이유를 하나 가지게 된다고 했어요. 누군가는 그 시간들이 실제였다는 대가를 치러야 한다고.”
민서는 그녀를 바라보았다. 이 이야기는 미담이 아니었다. 누군가를 살리기 위해 자신을 내어준 일이면서, 동시에 남은 사람에게 기억의 짐을 온전히 떠넘긴 일이었다. 그는 서윤을 구했다. 또 서윤을 혼자 기억하게 만들었다.
“결제 금액은 뭡니까.”
서윤은 입술을 다물었다.
“가장 소중한 감정 하나.”
그 말은 영수증 위의 문장보다 더 무겁게 들렸다.
“당신이 무엇을 잃었는지는 나도 몰라요. 거래가 끝난 뒤 당신이 내 얼굴을 봤어요. 그리고 아주 조용해졌어요. 울지도, 화내지도 않았어요. 나를 안으려 하지도 않았고요. 그냥 손목에 글을 썼어요. 그 애를 미워하지 마. 당신이 나를 보면서 한 마지막 부탁이었어요. 나를 위한 말인지, 당신 자신을 위한 말인지 모르겠어요.”
민서는 손목의 흉터를 만졌다. 얇은 선 아래로 심장이 뛰는 감각이 있었다. 그러나 가슴은 고요했다. 너무 고요해서 무언가 빠져나간 자리가 처음부터 비어 있었던 것처럼 느껴졌다.
“저는 지금 당신을 봐도 아무렇지 않습니다.”
서윤은 눈을 감았다. 그 말이 그녀를 다치게 한다는 것을 민서는 알 수 있었다. 알 수는 있었다. 그런데 아프지는 않았다.
“알아요.”
“미안합니다.”
“그 말도 이상하게 들리네요.”
민서는 고개를 숙였다. 사과는 입에서 나왔지만 몸속 어느 곳에도 닿지 않았다. 그는 자신이 무례하다고 생각했다. 잔인하다고도 생각했다. 생각은 가능했다. 감정은 오지 않았다.
서윤은 주머니에서 작은 머리핀 하나를 꺼냈다. 흰 플라스틱 꽃이 달린 유치한 머리핀이었다.
“지안이 거예요. 당신이 가져가라고 했어요. 언젠가 기억이 없어도 이건 알아볼 거라고.”
민서는 머리핀을 받았다. 아주 가벼웠다. 한 아이의 물건이라고 하기에는 지나치게 가볍고, 한 생의 증거라고 하기에는 견딜 수 없이 작았다. 그는 그것을 손바닥 위에 올려놓고 오래 바라보았다. 흰 꽃잎 가장자리에 오래된 때가 끼어 있었다.
그는 아무것도 떠올리지 못했다.
눈물도 나지 않았다.
그 사실이 가장 선명한 증거였다. 자신이 무엇을 잃었는지 그는 그제야 조금 알 것 같았다. 슬픔이었다. 지안을 부르면 무너져야 할 자리, 서윤을 보면 사랑과 증오가 뒤섞여 숨을 막아야 할 자리, 살아남은 사람들 앞에서 다시는 원래대로 돌아갈 수 없음을 알아야 할 자리. 그곳이 조용했다.
조용하다는 것은 편안하다는 뜻이 아니었다. 소리가 있어야 할 곳에 아무것도 없을 때, 사람은 침묵의 모양으로 상실을 배운다.
해가 기울고 있었다. 옥상 바닥에는 물이 고인 자국들이 말라가며 어두운 테두리만 남겼다. 서윤은 난간에서 완전히 물러나 옥상 문 쪽으로 걸었다. 민서는 그녀를 붙잡지 않았다. 붙잡고 싶다는 마음이 생기지 않았다. 보내고 싶다는 마음도 생기지 않았다. 그는 그저 그녀가 살아서 걸어가는 모습을 보았다.
문 앞에서 서윤이 돌아섰다.
“당신은 왜 그런 선택을 했을까요.”
민서는 대답을 찾지 못했다. 기억은 없었고, 감정은 비어 있었다. 선택의 주인이라고 말하기에는 자기 안에 남은 것이 너무 적었다. 그런데도 손바닥 위의 머리핀을 버릴 수 없었다. 영수증도 찢을 수 없었다. 손목의 문장을 가릴 수는 있어도 지울 수는 없었다.
“모르겠습니다.”
그는 천천히 말했다.
“그래도 제가 한 일 같습니다.”
서윤은 그 말을 듣고 아주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옥상 문을 열고 내려갔다.
민서는 혼자 남았다. 바람이 세게 불었다. 그는 머리핀을 주머니에 넣고 영수증을 다시 펼쳤다. 품목과 결제 방식과 결제 금액은 그대로였다. 맨 아래에 처음에는 보지 못했던 작은 문장이 하나 더 있었다. 빛을 비스듬히 받자 흐린 글자가 떠올랐다.
잔액: 없음.
민서는 그 문장을 오래 바라보았다. 슬프지 않았다. 슬프지 않아서, 자신이 잃은 것이 무엇인지 더 분명했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그는 꽃집 앞에서 멈춰 섰다. 흰 국화와 노란 프리지아가 양동이에 꽂혀 있었다. 어떤 꽃을 사야 하는지 알 수 없었다. 그는 가장 작은 꽃다발을 골랐다. 왜 그것을 골랐는지 설명할 수 없었다. 계산을 마친 뒤 점원이 영수증을 줄까요, 하고 물었다.
민서는 잠시 망설이다가 고개를 저었다.
집에 도착하자 아침에 구운 식빵은 토스터 안에서 차갑게 굳어 있었다. 커피 필터에는 붓지 못한 물의 자국만 남아 있었다. 그는 꽃다발을 빈 컵에 꽂고, 흰 머리핀을 그 옆에 놓았다. 이름을 적을 종이를 찾다가 그만두었다. 이름은 기억이 아니어도 남을 수 있었다. 부를 때 아무것도 따라오지 않아도, 입술은 그 모양을 배울 수 있었다.
“지안.”
그는 한 번 말했다.
방 안은 조용했다. 가슴은 뛰지 않았고, 눈은 젖지 않았다. 아무 문도 열리지 않았다.
민서는 불이 꺼진 창에 비친 자기 얼굴을 보았다. 낯선 사람처럼 보이지는 않았다. 익숙한 사람이라고 말하기에도 부족했다. 그는 손목의 글씨를 손가락으로 가만히 덮었다. 그 애를 미워하지 마. 그 문장이 누구를 향한 것인지 아직 알 수 없었다. 서윤인지, 죽은 아이인지, 기억을 지운 자신인지.
그는 불을 끄지 않고 침대에 누웠다. 꽃 냄새가 아주 희미하게 방 안을 떠돌았다. 슬픔이 없는 밤은 깊었고, 이상할 만큼 맑았다. 민서는 그 맑음이 견딜 만하다고 생각했다. 그것이 더 잔혹하다는 것도 생각했다.
잠들기 전, 그는 영수증을 접어 지갑 안쪽에 넣었다. 언젠가 다시 발견하더라도 아마 같은 질문을 하게 될 것이다. 무엇을 팔았는지, 누구를 구했는지, 그 선택은 아직 자기 것인지.
대답은 돌아오지 않을 것이다.
그래도 아침이 오면 그는 꽃의 물을 갈 것이다. 이름을 한 번 더 불러볼 것이다. 아무것도 느끼지 못한 채로, 자신이 느낄 수 없게 된 것을 돌볼 것이다.
작성일: 2026년 5월 31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