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롬프트는 작가인가 — 지시문과 창작 행위의 경계¶
생성형 모델 앞에서 한 사람이 문장을 입력한다. "황혼의 부두, 비에 젖은 코트를 입은 형사, 1940년대 누아르 조명." 몇 초 뒤 이미지가 나온다. 마음에 들지 않으면 다시 누르고, 단어를 바꾸고, 수십 번째에 한 장을 고른다. 그는 이 이미지의 작가인가. 이 질문은 오래 미뤄둘 수 없는 실무적 압력을 갖는다. 공모전은 출품 자격을 정해야 하고, 갤러리는 작품에 이름을 붙여야 하며, 저작권 제도는 보호 대상을 가려야 한다.
"프롬프트는 작가인가"라는 물음이 예/아니오의 선택지로 보이는 까닭은 작가성을 하나의 자격으로 다루는 데 있다. 작가이거나 작가가 아니거나, 둘 중 하나라는 전제가 질문을 양자택일로 만든다. 이 글의 중심 논제는 그 전제를 푸는 데서 출발한다. 작가성은 단일 자격이 아니라 발상·실행·선택·형성·귀속이라는 분리 가능한 기능들의 묶음이며, 그것들을 가르는 결정적 기능은 실행도 발상도 아닌 형성의 소재지다. 산물의 형식을 빚는 형성이 작가 안에 있으면 그는 사전 설계로든 사후 포착으로든 작가가 된다. 프롬프트 작성자는 발상과 선택을 분명하게 행사하지만 형성을 모델에 위임한다. 그는 작가성의 한 축만 쥔 부분적 작가다.
작가성은 단일 자격이 아니라 기능들의 묶음이다¶
인간 작가가 단일한 귀속점이던 시대에는 작가성을 구성하는 요소들이 한 사람 안에서 겹쳐 있었다. 화가는 무엇을 그릴지 구상하고(발상), 직접 붓을 들어 형상을 만들고(실행), 수많은 시도 중 남길 것을 고르고(선택), 그 안목을 자기 신체와 생애의 훈련에서 길렀으며(형성), 완성된 작품에 서명하고 책임과 공로를 받았다(귀속). 다섯 기능이 한 몸에 모여 있었으므로 그것들을 따로 떼어 볼 필요가 적었다. 작가라는 말은 이 결합을 한 단어로 묶어주는 이름이었다.
푸코(Michel Foucault)가 「저자란 무엇인가?」(Qu'est-ce qu'un auteur?, 1969)에서 제시한 저자 기능(fonction-auteur)은 이 결합이 자연적 사실이 아니라 제도적 구성물임을 보여준다. 푸코의 분석에서 저자는 글을 쓴 개인이 아니라 담론을 분류하고 소유하고 책임을 귀속하는 사회적 기능이다. 같은 문장이라도 사적인 편지에 적히면 저자가 문제되지 않고, 출판된 작품에 실리면 저자가 호명된다. 저자성은 텍스트의 내부 속성이 아니라 텍스트를 다루는 사회적 처리 방식이다. 이 관점은 두 가지를 함의한다. 작가성을 떠받치는 여러 기능은 원래 따로 떼어 물을 수 있고, 그 가운데 무엇을 작가의 표지로 삼을지는 시대마다 다시 정해진다는 것이다. 프롬프트 작성자가 작가인지 묻는 일은, 그에게 어떤 조건에서 저자 기능을 부여할 수 있는지 묻는 일과 같다.
프롬프트는 발상과 선택을 수행한다¶
프롬프트 작성은 다섯 기능 가운데 두 가지를 분명하게 수행한다. 첫째는 발상이다. 어떤 장면을, 어떤 정조로, 어떤 양식 안에서 만들 것인가는 작성자의 개념적 구상에서 나온다. 누아르 조명과 비에 젖은 부두를 결합한 것은 모델이 아니라 작성자다. 모델은 그 결합을 요청받기 전까지 그것을 떠올리지 않는다.
둘째는 선택이다. 모델은 하나의 프롬프트에서 여러 후보를 내놓고, 같은 프롬프트를 다시 입력하면 또 다른 후보군을 내놓는다. 작성자는 그 사이에서 무엇을 버리고 무엇을 남길지 판단한다. 알고리즘이 생성한 결과물에서 원본의 고유성을 찾을 수 있는가가 분석했듯, 동일한 지시문에서 갈라지는 결과들 사이에는 위계가 없다. 어떤 출력도 다른 출력의 원본이 아니다. 위계 없는 후보군에 질서를 부여하는 행위가 선택이며, 이 선택은 작성자의 안목이 개입하는 자리다.
발상과 선택은 가벼운 기능이 아니다. AI가 감동을 만들 때 창의성의 기준은 어디로 가는가는 창작 과정에서 판단 책임과 공로 귀속을 분리하면서, 프롬프트 작성자가 어떤 개념적 배치를 만들고 무엇을 기준으로 후보를 골랐는지를 평가의 한 층위로 제시했다. 그 글이 질문으로 열어둔 자리를 작가성이라는 개념이 채운다. 발상하고 선택하는 자는 작가성의 일부를 이미 행사하고 있다.
실행하지 않는 작가라는 반론¶
가장 먼저 마주칠 반론은 실행의 부재가 작가성을 부정하지 못한다는 데서 나온다. 건축가는 벽돌을 직접 쌓지 않는다. 영화감독은 카메라를 직접 들지 않고, 배우의 얼굴을 직접 연기하지 않는다. 작곡가는 교향곡의 모든 악기를 직접 연주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이들은 작가로 인정된다. 영화의 작가주의(auteur) 이론은 감독을 촬영기사나 편집자가 아니라 작품 전체의 작가로 세운다. 작가성의 핵심이 실행이 아니라 발상과 통제에 있다면, 프롬프트 작성자도 발상하고 통제하므로 작가의 자격을 갖는다. 직접 픽셀을 칠하지 않는다는 사실은 건축가가 직접 벽돌을 쌓지 않는다는 사실만큼이나 작가성과 무관하다.
이 반론은 작가성을 실행으로 환원하려는 시도를 정확히 무너뜨린다. 손의 노동을 작가의 필수 조건으로 삼으면, 우리는 건축과 영화와 작곡의 대부분을 작가 없는 산물로 처리해야 한다. 그 결론은 받아들이기 어렵다. 실행하지 않는 작가는 가능하며, 작가성의 무게중심은 발상과 통제 쪽에 놓인다.
사진가라는 더 강한 반례¶
건축가와 감독은 결과를 사전에 설계한다는 공통점을 갖는다. 설계도와 콘티는 산물을 미리 규정하고, 실행자는 그 규정을 구현한다. 여기서 한발 더 나아가면 프롬프트 옹호론은 더 강한 동맹을 얻는다. 사진가다.
사진가는 빛을 만들지 않는다. 피사체를 빚지 않고, 거리에서 벌어지는 사건을 연출하지도 않는다. 세계는 주어져 있고, 사진가가 하는 일은 프레임을 정하고 셔터를 누를 순간을 고르는 것이다. 카르티에브레송(Henri Cartier-Bresson)이 결정적 순간(l'instant décisif)이라 부른 것은 이 사후 포착의 미학이다. 사진가는 세계를 사전에 명세하지 못한다. 그는 흘러가는 가능성의 장에서 한 순간을 사후에 붙잡는다. 그럼에도 사진가의 작가성은 흔들리지 않는다. 사후에 고르는 자도 작가일 수 있다는 사실은, 프롬프트 작성자가 모델이 쏟아낸 후보를 사후에 고른다는 점만으로 작가의 자리에서 밀려나지 않음을 함의한다. 사진과 프롬프트는 둘 다 주어진 가능성의 장에서 포착하고 선택하는 행위처럼 보인다.
이 반례는 통제의 시점으로 작가와 주문자를 가르려는 시도를 무너뜨린다. 사전 설계만이 작가성을 보증한다면 사진가는 작가가 아니어야 한다. 사진가가 작가인 한, 작가성의 분기점은 통제가 사전이냐 사후냐에 있지 않다.
분기점은 형성이 누구 안에 있는가다¶
사진가의 작가성이 어디서 오는지 보면 프롬프트와의 차이가 드러난다. 사진가가 한 순간을 고를 때, 그 선택은 형식을 생성하는 선택이다. 어느 각도에서 무엇을 프레임에 넣고 어느 0.1초에 누를지를 정하는 일이 곧 그 사진의 구도와 긴장을 만든다. 그리고 그 포착을 가능하게 하는 시선은 사진가의 신체와 훈련에서 길러졌다. 무엇이 결정적 순간인지 보는 눈은 수천 번의 실패와 응시로 형성된 그의 것이다. 사진가에게서 형성과 선택은 한 행위로 융합한다. 산물의 형식을 빚는 형성이 사진가 안에 있고, 선택의 순간에 그 형성이 곧바로 산물에 각인된다.
프롬프트 작성자의 선택은 다른 구조를 갖는다. 그가 고르는 것은 모델이 이미 형식을 부여해 내놓은 완성된 후보들이다. 구도, 색감, 질감, 양식은 선택 이전에 모델이 결정했다. 작성자의 선택은 형식을 생성하는 선택이 아니라 이미 생성된 형식 중의 선택이다. 그의 안목도 형성된 것이지만, 그 형성은 좋은 후보를 알아보는 능력이지 후보 자체의 형식을 빚는 능력이 아니다. 산물의 형식을 빚는 형성은 모델과 그 학습 데이터에 축적되어 있다. 그 데이터는 셀 수 없는 타인들이 살아낸 시간과 노동의 흔적이며, 프롬프트가 호출하는 지친 문체나 낡은 사진의 색감은 그 흔적을 패턴으로 재구성한 결과다.
여기서 작가성의 분기점이 분명해진다. 분기점은 손을 움직였는가도, 통제가 사전이냐 사후냐도 아니다. 분기점은 산물의 형식을 빚는 형성이 선택하는 주체 안에 있는가, 바깥에 있는가다. 건축가는 형성이 자기 안에 있어 사전 설계로 각인하고, 사진가는 형성이 자기 안에 있어 사후 포착으로 각인한다. 두 경우 모두 형성과 선택이 한 주체에서 만난다. 프롬프트 작성자는 형성을 모델에 두고 선택만 자기 손에 쥔다. 형성과 선택이 두 주체로 갈라진다. 그가 발상하고 선택한다는 사실은 참이지만, 그 선택이 형식을 만드는 데까지 닿지 못한다는 사실 또한 참이다.
귀속은 공로·권리·설명으로 갈라진다¶
형성이 모델에 있어도 작성자가 발상과 선택을 한다면, 그를 작가로 부를지 말지는 누가 정하는가. 귀속은 작품 내부에서 답이 나오지 않는다. 그리고 귀속이라는 말은 하나가 아니라 세 겹으로 갈라진다.
첫째는 공로 귀속이다. 감동을 만든 기여가 누구의 몫인가를 가르는 문제다. 발상과 선택의 밀도가 높을수록 작성자의 공로 지분은 커지고, 모델의 기본값이 대부분을 결정했을수록 작아진다. 둘째는 법적 권리의 귀속이다. 작품을 소유하고 보호받을 자격이 누구에게 있는가의 문제이며, 여러 법역에서 인간 저자성을 요건으로 두는 경향이 보고된다. 다만 순수 자동 생성물의 보호 여부는 아직 법적으로 확정되지 않은 논쟁 영역이므로 단정하기 어렵다. 셋째는 설명 책임의 귀속이다. 이 산물이 어떤 의도와 선택과 편집을 거쳤는지 감상자와 평가자에게 제시할 부담이 누구에게 있는가의 문제다. 공로가 크다고 법적 권리가 자동으로 따라오지 않고, 법적 권리가 없다고 설명 책임이 면제되지도 않는다. 세 귀속은 같은 말로 묶이지만 서로 다른 제도가 서로 다른 근거로 정한다.
비어즐리와 윔샛(Monroe Beardsley & W. K. Wimsatt)이 「의도의 오류」(The Intentional Fallacy, 1946)에서 작품 평가에 작가의 의도를 끌어들이는 일을 경계한 까닭이 여기서 무게를 갖는다. 의도가 있었다는 사실은 작품의 가치를 보증하지 못한다. 같은 논리로, 프롬프트 작성자에게 발상의 의도가 있었다는 사실만으로는 그가 공로를, 권리를, 설명의 권위를 자동으로 갖지 못한다. 의도는 작가성을 여는 입구일 수 있어도 그 자체로 작가성을 완성하지 못한다. 미술관 벽에 프롬프트를 걸면이 보여주듯, 뒤샹(Marcel Duchamp)의 변기를 예술로 만든 것은 제작 의도가 아니라 그것이 놓인 장소, 그 장소가 부여한 해석 틀, 그리고 그 틀을 받아들인 공동체였다. 프롬프트의 귀속도 같은 협상의 입구에 있다.
경계는 두 통제의 혼합 비율이다¶
형성이 모델에 있다는 사실이 프롬프트 작성을 영구히 주문의 자리에 묶어두지는 않는다. 한 작가 행위 안에서 사후 선별형 통제와 사전 설계형 통제는 섞일 수 있고, 그 혼합 비율이 작가 행위에 가까운 정도를 만든다.
한쪽 끝에는 한 줄을 입력하고 첫 결과를 그대로 받는 행위가 있다. 형성도 선택도 거의 없는 이 행위는 주문에 가깝다. 다른 쪽 끝에는 수백 번의 재생성과 미세한 프롬프트 수정, 후보들의 비교와 후처리가 누적되어 결과가 점점 좁혀지는 과정이 있다. 작성자가 모델의 거동을 학습해 원하는 형식을 예측하고 끌어낼수록, 그의 선택은 단순한 사후 고르기를 넘어 형식을 사전에 겨냥하는 통제로 이동한다. 사후 선별이 충분히 반복되고 정교해지면 그것은 사전 설계에 근접한다. 형성의 일부가 모델에서 작성자의 의도 쪽으로 옮겨오는 것이다. 통제의 종류는 둘로 나뉘지만, 한 과정은 둘의 혼합이며, 혼합의 비율이 지시문과 창작 행위 사이의 연속체를 만든다.
프롬프트는 작가성의 한 축을 쥔 부분적 작가다¶
프롬프트 작성자는 비어버린 작가의 자리를 통째로 차지하지 못하고, 그 자리와 무관하지도 않다. 그는 작가성의 다섯 기능 가운데 발상과 선택을 행사하는 부분적 작가다. 산물의 형식을 빚는 형성은 모델과 그 데이터에 분산되고, 공로와 권리와 설명 책임의 귀속은 서로 다른 제도가 나누어 정한다. 원본 없는 시대의 미학이 작가성을 해석 책임의 분배 문제로 되돌려 보낸 자리에서, 이 글은 그 분배의 구조를 작가성의 기능별 분할로, 그 분할의 분기점을 형성의 소재지로 그린다.
이 결론은 질문의 형태를 바꾼다. 물어야 할 것은 "프롬프트는 작가인가"가 아니라 "이 프롬프트 작성 과정은 작가성의 어떤 기능을 어느 정도 수행했는가"다. 발상은 누구의 것이었는가. 선택은 형식을 겨냥할 만큼 반복되고 정교했는가. 산물의 형식을 빚은 형성은 작성자 안에 있었는가, 모델 안에 있었는가. 공로와 권리와 설명 책임은 각각 어떤 제도가 어떤 근거로 정하는가. 작가성을 하나의 자격으로 두면 이 질문들은 보이지 않는다. 작가성을 기능들의 묶음으로 풀고 그 분기점을 형성에 두면, 프롬프트 앞의 인간은 작가도 단순한 사용자도 아닌, 분할된 작가성의 한 축을 쥔 자로 정확히 자리매김된다.
이어 읽기¶
- 원본 없는 시대의 미학 — 작가의 부재를 진단한 출발점. 이 글의 전제를 앞쪽에서 받쳐준다.
- AI가 감동을 만들 때 창의성의 기준은 어디로 가는가 — 발상과 선택이 창의성 평가의 어느 층위에 놓이는지로 이어진다.
- 미술관 벽에 프롬프트를 걸면 — 귀속 기능을 제도 인정의 각도에서 확장한다.
- 책임지는 인격 없는 행위성 — 작가성의 귀속 문제를 책임 귀속 일반의 문제로 확장한다.
작성 정보¶
초안 작성: Claude · Claude Opus 4.8 · Max Adaptive Thinking
검토·개고: ChatGPT · GPT-5.5 Extended Thinking
참고자료¶
- Michel Foucault, Qu'est-ce qu'un auteur? (1969)
- W. K. Wimsatt and Monroe C. Beardsley, "The Intentional Fallacy," The Sewanee Review 54, no. 3 (1946)
- François Truffaut, "Une certaine tendance du cinéma français," Cahiers du cinéma 31 (1954)
- Henri Cartier-Bresson, Images à la sauvette (Paris: Verve, 1952)
- Walter Benjamin, Das Kunstwerk im Zeitalter seiner technischen Reproduzierbarkeit (1936)
인포그래픽¶

작성일: 2026년 6월 1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