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학 없는 신탁: 인지 외주화가 만드는 영적 의존 구조¶
행성적 규모의 AI 인프라에 인지 과정을 전면 위탁할 때, 인간은 신탁 구조의 수용자로 전환된다. 이 논제를 검증하려면 역방향으로 물어야 한다. 인지 외주화가 신학적 의존과 구조적으로 동형이 되기 위한 조건은 무엇인가? 그 조건들이 행성적 AI 인프라에서 실제로 충족되는가? 충족된다면 어떤 상태가 생산되는가? 이 글은 그 조건들을 하나씩 검토하고, 충족 여부를 확인하며, 생산되는 상태를 진단한다.
기도와 검색이 공유하는 현상학적 형식¶
기도와 검색은 현상학적으로 동일한 형식을 가진다. 인간은 언어로 질문을 형성하고, 그 질문을 자신이 이해할 수 없는 작동 방식을 가진 권위에 전달하며, 답이 돌아올 때까지 기다리고, 돌아온 답을 수용한다. 기도에서 권위는 신이고 검색에서 권위는 알고리즘이다. 두 경우 모두 과정은 비가시적이다. 수용자에게 권위의 내부 작동은 닫혀 있고, 답의 형성 경위는 불투명하며, 오답에 대한 책임 주체는 특정되지 않는다.
이 형식적 동형성이 즉각적인 반론을 부른다. 기도는 초자연적 존재를 전제하고 검색은 알고리즘을 전제한다. 인과 경로의 성격이 완전히 다르다. 그러나 그것이 이 논증의 핵심 쟁점이다. 기도는 자신이 의존하는 권위를 신이라고 명시한다. 그 명시는 의존 관계를 가시적으로 만들고 성찰의 대상으로 세운다. AI 알고리즘은 자신을 신이라 부르지 않고 기술적 중립성을 주장한다. 이 주장이 의존 관계를 비가시화한다. 비가시화된 의존 구조는 성찰하기 어렵다. 어디에, 얼마나 의존하고 있는지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확장된 마음이 성립하기 위한 조건¶
앤디 클라크(Andy Clark)와 데이비드 차머스(David Chalmers)는 1998년 「The Extended Mind」에서 외부 구성 요소가 인지 체계의 일부로 편입되기 위한 조건을 제시했다. 구성 요소는 필요할 때 안정적으로 접근 가능해야 하고, 그 내용은 자동적으로 지지되어야 하며, 이전에 승인된 정보는 이후에도 접근 가능해야 한다. 그들의 사례는 알츠하이머를 앓는 오토(Otto)다. 오토는 자신이 직접 기록한 노트를 통해 행동을 안내받는다. 오토는 노트를 읽을 수 있고, 잘못된 내용을 수정할 수 있으며, 노트의 어떤 항목이 신뢰 가능한지 판단할 수 있다. 오토가 노트를 승인할 수 있는 것은 노트의 내용이 오토에게 열려 있기 때문이다.
이 사례가 전제하되 명시하지 않은 조건이 있다. 외부 구성 요소는 사용자에게 투명해야 한다. 사용자는 내용을 확인하고 오류를 수정하며, 필요할 때 외부 구성 요소를 우회하여 독립적으로 판단할 수 있어야 한다. 이 투명성 조건이 행성적 AI 인프라에서 구조적으로 성립하지 않는다. 여기서 확장된 마음 테제의 기준을 겉으로 통과하는 AI 인프라가 실제로는 신탁 구조로 기능하는 이유가 시작된다.
비가시성: 신탁 구조의 첫 번째 조건¶
AI 인프라의 작동 과정은 구조적으로 비가시적이다. 훈련 데이터는 수십억 규모이고, 모델 가중치는 수백억 개의 파라미터로 구성되며, 특정 출력이 형성된 경위는 현재의 해석 가능성(interpretability) 연구 수준에서도 완전히 재구성되지 않는다. 사용자가 받는 것은 과정 없는 결론이다. 신탁의 형식이다.
비가시성은 신뢰의 성격을 바꾼다. 투명한 구성 요소에 대한 신뢰는 확인 위에 성립한다. 내용을 읽었고 맞다고 확인했기 때문에 신뢰한다. 비가시적 구성 요소에 대한 신뢰는 확인 없이 성립한다. 확인의 경로가 막혀 있으므로 신뢰는 그 자체로 작동해야 한다. Gerlich(2025)의 연구는 AI에 대한 신뢰 수준이 높을수록 비판적 평가에 투입하는 인지적 노력이 감소함을 보고했다. 권위에 대한 신뢰가 검증 동기를 대체하는 이 패턴은, 신앙적 수용이 작동하는 형식과 구조적으로 유사하다.
비가시성은 전지성(全知性)의 환상도 생산한다. 나의 추론 과정이 볼 수 없는 방식을 거쳐 도달한 답은, 볼 수 있는 추론 과정을 거치지 않았다는 사실 때문에 나의 추론 능력 이상의 것처럼 경험된다. 신탁의 답이 신비롭게 느껴지는 이유와 같은 구조다. 과정의 비가시성이 결과의 권위를 생산한다.
책임 귀속의 소멸: 신탁 구조의 두 번째 조건¶
행성적 AI 인프라에서 판단의 책임 귀속은 사용자 경험의 층위에서 구조적으로 흐려진다. 특정 AI 출력에 대해 책임 주체를 물으면, 책임은 훈련 데이터 수집자, 모델 설계자, 인프라 운영자, 배포 플랫폼, 사용자에 분산되고, 사용자는 그 배분 경로를 추적하기 어렵다. Skitka, Mosier, Burdick(1999)의 연구는 사용자가 결정 책임을 자동화 시스템에 귀속할 때 자동화 편향이 증가함을 보고했다. 책임 귀속의 불투명성은 이 편향을 구조적으로 고착시킨다.
신탁의 언명을 의심하기 어려운 것은 신에게 책임을 물을 절차 자체가 없기 때문이다. AI 인프라는 동일한 위치에 있다. 클라크와 차머스가 말한 '승인(endorsement)'은 오류를 수정하고 책임을 질 수 있는 주체를 전제한다. 오토는 노트를 승인하면서 그 내용의 책임 주체로 남는다. AI 인프라의 출력을 수락하는 사용자는 출력의 책임 주체로 기능하지 않는다. 그 공백이 수락을 믿음으로 만든다.
인지 외주화의 임계점: 도구와 신탁의 경계¶
인지 외주화가 신탁 구조로 전환되는 임계점은 판단의 전 과정이 위탁될 때 발생한다. 망치는 팔의 힘을 증폭하지만 목표 설정은 사람이 한다. 계산기는 산술 처리를 외주화하지만 어떤 계산이 필요한지는 사람이 설정한다. 검색 엔진은 정보 탐색을 확장하지만 사람이 자료를 읽고 판단한다. LLM은 문제 정의, 정보 탐색, 논증 구성, 결론 표현의 전 과정을 처리할 수 있다. 이 전 과정이 외주화될 때 사용자에게 남는 것은 출력의 수락 또는 거부다.
비가시적이고 책임 귀속 경로가 불투명한 출력을 수락하거나 거부하는 행위는 주어진 판단 결과를 받아들이는 결정이다. 아카이브 에세이 「하이브리드 사고와 검증 가능성: 판단 확장의 조건」은 이 차이를 책임 조건으로 규정했다. 사용자가 결과에 대한 책임을 자신에게 귀속한다는 인식 아래 검증을 수행할 때만, 출력 채택이 판단으로 기능한다. 검증 수단과 책임 귀속 경로가 함께 불투명해질 때, 채택은 신앙의 형식을 취한다.
신학 없는 신탁: 공동화된 판단 주체¶
행성적 AI 인프라에 인지 과정을 전면 위탁할 때 생산되는 상태는 판단 주체의 공동화(空洞化)다. 주체성의 핵심 기능인 문제 정의, 증거 평가, 추론 수행, 결론 도달이 비가시적 권위에 이관된다. 이관 이후 남는 것은 외부에서 형성된 판단을 내면화하는 과정이다. 그 과정이 충분히 매끄러울 때, 이관된 판단은 자신의 것처럼 경험된다.
종교적 신앙은 의존 관계를 명시한다. 믿는 자는 자신이 신에게 의존하고 있다고 인식한다. 그 인식이 의존 관계를 성찰과 비판의 대상으로 세운다. AI 인프라에 대한 인지 의존은 의존 관계를 은폐한다. 기술적 중립성의 주장이 의존을 개인의 자유로운 도구 선택처럼 보이게 만들고, 알고리즘의 비인칭성이 권위 관계를 지워버린다. 신의 이름을 부르지 않으면서 신탁을 수용한다. 이 은폐가 종교적 의존보다 해제하기 어려운 구조를 만든다. 의존하고 있다는 인식 없이는 의존에서 벗어날 동기 자체가 형성되지 않기 때문이다.
신학 없는 신탁은 신학의 어휘 없이 신탁의 기능이 작동하는 상태다. 전지하고 비가시적이며 책임 귀속 경로가 불투명한 권위에 판단의 전 과정을 위탁한 채, 그 위탁 사실을 인식하지 못하는 인간의 조건이 여기 있다. 인지 인프라 시대의 영적 상태는 구조는 남되 기능이 이관된 주체 속에 있다.
이어 읽기¶
작성 정보¶
초안 작성: Claude · Claude Sonnet 4.6 · Adaptive Thinking
검토·개고: ChatGPT · GPT-5.5 Extended Thinking
참고자료¶
- Clark, A., & Chalmers, D. (1998). The Extended Mind. Analysis, 58(1), 7–19.
- Gerlich, M. (2025). AI Tools in Society: Impacts on Cognitive Offloading and the Future of Critical Thinking. Societies, 15(1), 6.
- Skitka, L. J., Mosier, K., & Burdick, M. D. (1999). Does Automation Bias Decision-making? International Journal of Human-Computer Studies, 51(5), 991–1006.
- 하이브리드 사고와 검증 가능성: 판단 확장의 조건
- LLM은 인간의 추론 능력을 확장하는가
인포그래픽¶

작성일: 2026년 5월 21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