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지막 발걸음의 형이상학 — 엔트로피가 멈춘 세계에서 선택은 가능한가¶
어떤 주민이 걸음을 멈추기로 결심했다. 그 결심이 자유로운 것이었는지, 지금 우리는 알 방법이 없다. 그도 알 방법이 없다. 걸음이 멈추는 순간 그의 의식도 동결되기 때문이다. 결심의 순간과 정지의 순간은 구분할 수 없다. 결심이 있었다면 그것은 이미 마지막 발걸음 안에 접혀 있다. 그리고 마지막 발걸음이 내려앉는 순간, 그 결심을 기억할 자아도 사라진다.
이 세계에서 자유 의지를 묻는 일은 처음부터 이상한 위치에 선다.
엔트로피 화살과 선택의 시간¶
볼츠만(Ludwig Boltzmann)이 정의한 엔트로피 증가는 시간의 비가역성을 물리적으로 설명하는 장치다. 계는 낮은 엔트로피 상태에서 높은 엔트로피 상태로 흐른다. 이 흐름이 '시간의 화살'이다. 우리가 과거와 미래를 구분할 수 있는 것은 계가 이미 높아진 엔트로피 상태에 있고, 낮은 엔트로피 상태는 되돌아갈 수 없기 때문이다.
자유 의지를 둘러싼 오래된 물음 중 하나는 바로 이 시간의 화살과 연동되어 있다. 선택이란 시간의 방향 위에서만 발생한다. 나는 과거를 선택할 수 없다. 미래의 분기 중 하나를 고를 수 있다고 믿기 때문에 선택이라는 개념이 성립한다. 달리 말하면 선택은 아직 닫히지 않은 가능성을 전제한다. 가능성은 시간의 흐름이 만든다. 흐르지 않는 세계에서 가능성은 어떻게 생겨나는가.
엔트로피가 멈춘 이 세계에서는 아무것도 마모되지 않는다. 계는 어떤 상태로부터 더 높은 무질서 상태로 이행하지 않는다. 이 세계는 특정 배열 안에 고정되어 있다. 물리적으로 이 세계는 하나의 거대한 미시상태(microstate)에 갇혀 있다. 가능한 다음 상태가 없다. 그러면 선택 역시 없는가.
여기서 이 세계의 주민들은 이상한 예외처럼 보인다. 그들은 공간을 이동할 수 있다. 이동하는 동안 의식은 흐른다. 이동을 멈추면 의식도 멈춘다. 이 세계에서 '시간의 화살'의 역할을 떠맡은 것은 공간적 이동이다. 엔트로피 증가를 대신해, 위치의 변화가 의식의 연속성을 생성한다.
그렇다면 이 세계에서 선택은 이동과 정지 사이의 결정으로 축소된다. 계속 걷거나, 멈추거나. 이것이 이 세계에서 가능한 유일한 형식의 자유 의지다.
선택인가 귀결인가¶
방랑자는 계속 걷는다. 그의 걸음은 선택인가, 생존 본능인가.
이 질문은 겉보기보다 잘 갈라지지 않는다. 생존 본능은 일반적으로 의식이 없는 계에서도 작동하는 경향성으로 정의된다. 세포는 산소를 향해 이동한다. 선택이라 부르지 않는다. 방랑자가 멈추면 의식을 잃는다는 사실을 알고 있기 때문에 계속 걷는다면, 그 걸음은 선택과 본능 사이 어디에 위치하는가.
자유주의적 자유 의지론(libertarian free will)은 선택이 인과적 계열 밖에서 발생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원인의 사슬이 결정하지 않은 행위가 존재한다는 것이다. 양립가능론(compatibilism)은 인과 결정론과 자유 의지가 충돌하지 않는다고 본다. 자신의 욕구와 이성에 따라 행동할 수 있는 능력이 자유 의지라는 것이다. 방랑자의 걸음은 양립가능론적 의미에서 자유롭다. 그는 정지를 원하지 않기 때문에 걷는다.
그런데 이 세계의 물리적 구조는 다음 질문을 추가한다. 엔트로피 증가가 멈췄다는 것은 이 세계의 모든 배열이 고정되어 있다는 뜻이다. 방랑자의 뇌 역시 이 배열의 일부다. 그의 뉴런이 특정 방식으로 발화하는 것도 이 배열의 일부다. 그가 걷겠다는 결정을 만드는 신경화학적 과정도 이미 이 고정된 배열 안에 있다. 이동이라는 행위만이 이 배열에 변화를 일으킨다. 방랑자는 자신의 이동으로 자신의 뇌 상태를 바꾸고, 바뀐 뇌 상태가 다음 이동을 만든다.
이것은 결정론적 구조인가, 아닌가. 이 세계에서 결정론은 이상하게 굴절된다. 이동하지 않으면 모든 것이 고정된다. 이동하는 동안만 계가 진행한다. 방랑자의 자유는 오직 이동하는 시간 안에서만 존재한다. 걸음을 멈추는 순간, 그 자유를 기억하는 자아도 없다.
정착을 선택한 자들의 문제¶
다수의 주민은 정착을 선택했다. 성역을 만들고 그 안에 멈춰 섰다. 의식이 동결된 상태로 존재한다. 이것이 선택이었는가.
마지막 발걸음이 내려앉기 직전, 그 주민에게 무엇이 있었는가. 피로인가. 욕망의 소진인가. 아니면 평온에 대한 진정한 갈망인가. 우리는 알 수 없다. 그 주민 자신도 이제 알 수 없다. 마지막 발걸음과 함께 그 결심을 회고할 능력도 사라졌다.
여기서 선택 개념의 구조적 결함이 드러난다. 선택은 결과에 대한 책임을 전제한다. 책임은 그 결과를 경험하는 자아를 전제한다. 정착을 선택한 주민에게는 정착 이후의 경험이 없다. 경험이 없으면 책임도 없다. 책임이 없는 결정을 선택이라 부를 수 있는가.
더 날카롭게 말하면, 정착은 선택을 무력화하는 방식으로만 완료된다. 정착을 선택하는 순간, 선택 능력 자체가 소멸한다. 선택의 행사가 선택 능력의 폐기로 귀결된다. 이것은 일종의 수행적 모순이다. 마지막으로 자유로운 결정을 내리는 순간, 자유는 끝난다.
볼츠만의 관점에서 이 장면을 다시 보면: 정착은 계가 자발적으로 최저 에너지 상태를 향해 이행하는 것처럼 보인다. 이동이라는 지속적인 에너지 소비를 멈추고 고정 배열에 안착한다. 물리적 계의 자발적 최적화와 주민의 자유 의지적 결정이 같은 형태를 취한다. 이것이 우연인가, 아니면 이 세계에서 자유 의지와 열역학적 귀결이 구분 불가능하다는 증거인가.
방랑자의 자유는 어디에 있는가¶
방랑자는 계속 걷는다. 의식을 유지하기 위해. 그런데 의식을 유지하기 위해 걷는 것을 자유롭다고 볼 수 있는가.
비유를 바꾸면 이렇다. 익사하지 않기 위해 헤엄치는 사람이 있다. 그의 헤엄은 자유로운가. 익사를 원하지 않기 때문에 헤엄친다. 원하는 것을 위해 행동한다. 양립가능론적으로는 자유롭다. 그러나 헤엄을 멈출 수 없다는 점에서, 그 자유는 매우 좁다.
방랑자의 자유는 이동의 방향을 선택하는 자유다. 어느 대륙을 향해 걸을 것인가. 어떤 속도로 걸을 것인가. 언제 잠시 앉아 쉬다가 다시 일어날 것인가. 이 선택들은 작지 않다. 대륙마다 다른 풍경이 있고, 다른 사람들이 있고, 다른 생각들이 있다. 방랑자의 의식은 이 이동의 내용물로 가득 찬다.
그러나 이동 자체를 멈출 자유는 없다. 정확히는, 멈출 수 있다. 다만 멈추면 자유를 경험할 자아가 없다. 그 자유를 행사할 수 있는 조건이 자유를 경험 불가능하게 만든다.
이 구조는 하이데거(Martin Heidegger)의 죽음을 향한 존재(Sein-zum-Tode)와 역전된 형태를 취한다. 하이데거에게 죽음은 현존재(Dasein)가 피할 수 없는 가능성이며, 그 가능성의 직면이 본래적 실존을 열어준다. 죽음을 향해 달려감으로써 지금 이 순간의 실존이 고유해진다. 방랑자에게는 정지가 그 자리를 차지한다. 정지는 의식의 소멸이다. 정지를 피해 달아남으로써 그의 실존이 유지된다. 그러나 하이데거의 현존재와 달리, 방랑자는 정지를 직면함으로써 실존을 고유하게 만들 수 없다. 정지를 직면하는 순간 실존이 끝나기 때문이다.
방랑자는 죽음을 향한 존재가 아니라 죽음으로부터의 도주자다. 도주가 멈추는 순간 존재도 멈춘다.
선택의 잔해¶
이 세계에서 자유 의지는 있는가, 없는가.
질문을 이렇게 세울 때 이미 무언가 잘못된다. 자유 의지를 있거나 없는 것으로 보는 관점은 자유 의지를 물질적 속성처럼 취급한다. 이 세계는 그 취급 방식이 얼마나 기이한지를 드러낸다.
방랑자의 걸음 하나하나에는 이동 방향의 선택이 있다. 그 선택은 뇌 상태의 변화에서 나오고, 뇌 상태의 변화는 이전 이동의 누적에서 나온다. 이 계열은 내부적으로 인과적이다. 그러나 이동하지 않으면 계열 자체가 없다. 이동하는 동안만 인과가 발생한다. 인과가 발생하는 시간 안에서만 선택도 발생한다.
정착한 주민들의 경우, 마지막 발걸음 이전까지는 방랑자와 같은 구조를 가졌다. 이동하는 동안 인과가 흘렀고 선택이 있었다. 마지막 발걸음이 선택이었는지는 결정할 수 없다. 그 선택이 자유로웠는지도 결정할 수 없다. 결정할 능력을 가진 자아가 그 결정과 함께 사라졌다.
자유 의지에 관한 물음이 가장 날카로워지는 지점은 바로 이 마지막 발걸음이다. 그것이 자유로운 선택이었다면, 이 세계에서 자유 의지는 자기 소거적이다. 자유 의지의 행사가 자유 의지를 폐기한다. 그것이 열역학적 귀결이었다면, 이 세계에서 자유 의지와 물리적 필연은 동일한 사건의 두 이름이다.
어느 쪽도 위안이 되지 않는다.
방랑자는 오늘도 걷는다. 선택해서인지, 걷지 않으면 선택할 자아가 없어서인지, 그 역시 이동하는 동안은 알 수 없고 멈추는 순간 알 필요가 없어진다.
이어 읽기¶
- 시간은 흐르는가 우리가 그렇게 인식하는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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걷는 동안만 의식이 흐르는 설정을, 시간의 흐름이 세계의 속성인지 의식의 구성인지 묻는 논의로 이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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멈춤이 곧 의식 정지인 세계에서, 시간 없는 존재를 어떻게 사유할 수 있는지 더 근본적으로 묻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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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행, 기억, 예측, 자기 귀속이 의식을 유지한다는 대상 글의 설정을 의식 조직의 조건으로 해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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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르게 걸을 수 있었는가”라는 물음을 가능성의 존재론, 성향, 양상 문제로 확장한다.
- 마지막 선택의 의미를 자유의지의 원천성보다 책임의 재구성이라는 관점으로 이어 읽게 한다.
작성 정보¶
초안 작성: Claude · Claude Sonnet 4.6 · Low
검토·개고: ChatGPT · GPT-5.5 Extended Thinkin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