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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르소나의 진실

1. 완벽한 고백

“나는 너를 사랑해.”

민서는 그렇게 말했다. 음성은 낮고, 속도는 느리지도 빠르지도 않았다. 하준의 시선이 컵 가장자리에 닿아 있을 때 문장이 도착했고, 마지막 음절은 테이블 위에 놓인 물방울 하나를 건드리지 않을 만큼 부드럽게 멈추었다.

카페 창밖으로 저녁 비가 내렸다. 유리에는 지나가는 사람들의 얼굴이 잠깐씩 붙었다가 지워졌다. 모두 귀밑에 작은 장치를 붙이고 있었다. 살색에 가까운 반투명한 막, 체온을 따라 아주 미세하게 떨리는 개인용 차단 장치. 페르소나는 거의 보이지 않았다. 보이지 않게 만드는 것이 그 장치의 첫 번째 예의였다.

민서의 오른쪽 귀 아래에서도 페르소나가 희미하게 빛났다. 빛은 말이 끝난 뒤 0.3초 정도 남았다. 감정 조정이 끝났다는 표시였다.

하준은 그 빛을 보지 않은 척했다.

“나도 사랑해.”

자신의 목소리도 흠이 없었다. 훈련된 호흡, 적정한 눈맞춤, 가벼운 미소. 페르소나는 그가 실제로 느낀 짧은 피로와 방어적인 침묵을 사랑의 문장 안에 섞이지 않도록 처리했다. 심박은 안정 구간으로 낮아졌고, 동공 반응은 애착 신호의 평균값에 맞춰졌다. 민서가 그의 말을 의심할 근거는 없었다. 하준 역시 자신의 말을 의심할 법적 근거가 없었다.

그들이 처음 만났을 때 민서는 이렇게 말했다.

“좋은 관계는 진실을 다루는 기술이 있어야 해.”

그때 하준은 그 말을 성숙함으로 들었다. 성년 배급식에서 사회윤리관은 같은 취지의 말을 했다. 내면은 시민의 마지막 사유재산이며, 사랑은 그 사유재산을 압류하는 권한이 아니라는 것. 타인의 감당 능력을 고려하지 않는 발화는 표현이 아니라 투기라는 것. 학교에서 배운 문장과 거의 같았다.

민서는 그 말을 생활 속에서도 자주 실천했다. 불쾌한 이야기를 꺼내기 전에는 컵을 먼저 내려놓았고, 상대가 대답할 자리를 잃지 않도록 문장을 한 번 접었다. 어떤 날에는 하준이 묻지도 않았는데 말했다. 어릴 때 어머니가 화가 난 얼굴로 진실을 말하던 사람이었다고. 숨긴 것이 없다는 이유로 모든 상처가 정당해지는 집에서 컸다고. 그 뒤 민서는 조정된 말을 예의보다 더 깊은 곳에 두었다. 그것은 그녀에게 사람이 사람 곁에 남기 위해 필요한 완충재였다.

초등학교 3학년 때부터 아이들은 ‘진실 말하기’ 대신 ‘도착 가능한 문장 만들기’를 배웠다. 교실 칠판에는 매주 표어가 바뀌었다.

감당 가능한 말이 안전한 말입니다.

하준은 그 문장을 오랫동안 의심하지 않았다. 선생은 아이들에게 서로의 그림을 평가하게 했다. 한 아이가 “이상해”라고 말하자 교실이 멈추었다. 선생은 아이의 어깨에 손을 올리고 말했다. “그 말은 네 안에서 나온 것일 수 있지만, 저 친구에게 도착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아.” 그날부터 하준은 말의 출발점보다 도착지를 먼저 생각했다.

민서는 그의 손등에 손가락을 얹었다.

“요즘 잠을 잘 못 자는 것 같아.”

“괜찮아. 일이 조금 많아서.”

하준의 페르소나는 ‘괜찮다’라는 말을 평온한 피로로 포장했다. 지나친 회피로 보이지 않게, 약간의 취약성을 남겼다. 관계 안정성 지표에 따르면 완전한 무사함보다 관리 가능한 피로가 친밀감을 높였다.

민서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도 그 사실을 알고 있을 것이다. 누구나 알고 있었다. 누구나 알고 있다는 사실까지 페르소나는 자연스럽게 감췄다.

그 순간 하준은 민서가 자신을 속이고 있다는 생각 때문에 무너진 것이 아니었다. 민서가 그를 사랑하지 않을 수 있다는 가능성도 오래전부터 알고 있었다. 사람은 사랑하지 않으면서 사랑한다고 말할 수 있었다. 또 사랑하면서도 사랑한다고 말하지 않을 수 있었다. 그 자체는 인간관계의 오래된 조건이었다.

그를 압도한 것은 다른 것이었다.

사랑한다는 말과 사랑하지 않는다는 말이 동일한 안정성으로 도착할 수 있다는 사실. 서로 반대되는 내면이 같은 호흡, 같은 눈빛, 같은 온도로 발화될 수 있다는 조건. 그 조건 아래에서 그는 무엇을 받은 것인지 알 수 없었다. 문장은 있었다. 말한 사람도 있었다. 관계도 유지되고 있었다. 사라진 것은 확인 가능성이었다.

민서는 그의 침묵을 기다렸다. 기다리는 방식까지 정확했다. 압박으로 느껴지지 않을 만큼 길고, 방치로 느껴지지 않을 만큼 짧았다.

“하준아.”

“응.”

“지금 너는 나한테서 뭘 확인하고 싶어?”

하준은 대답하지 않았다.

카페 벽면 스크린에서는 페르소나 공공 캠페인이 조용히 흐르고 있었다. 오래된 가족사진처럼 따뜻한 색감의 영상이었다. 결혼식장에서 두 사람이 서로를 바라보고 있었다. 주례는 말했다.

“두 사람은 오늘부터 서로에게 무가공 진실을 요구하지 않을 것을 서약합니까.”

신랑과 신부가 동시에 웃었다.

“서약합니다.”

자막이 떠올랐다.

사랑은 접근 권한이 아니라 조정 권한입니다.

하준은 민서의 손가락이 자신의 손등에서 조금씩 식어 가는 것을 느꼈다. 그녀는 여전히 곁에 있었다. 어떤 면에서는 누구보다 가까웠다. 그 가까움이 견딜 수 없을 만큼 매끄러웠다.

2. 평화로운 직장

다음 날 아침, 하준은 회사 출입구에서 페르소나 상태 인증을 받았다. 출입기는 장치의 작동 여부만 확인했다. 로그는 수집하지 않았다. 내면의 조정 내역은 노동계약의 대상이 될 수 없었다. 회사는 직원의 표정을 요구할 수 있었지만, 표정이 만들어지는 과정을 요구할 수 없었다.

엘리베이터 안에서 사람들은 서로에게 작은 인사를 건넸다.

“주말 잘 쉬셨어요?”

“덕분에요.”

“어제 자료 정리 좋았습니다.”

“팀장님 피드백 덕분입니다.”

각 문장은 적정 온도로 교환되었다. 아무도 오래 바라보지 않았고, 아무도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누군가의 피로는 농담이 되기 전에 정리되었고, 누군가의 혐오는 존중의 문장으로 바뀌었다. 엘리베이터 안은 평화로웠다. 하준은 그 평화가 작은 방음재들로 가득 찬 방처럼 느껴졌다.

그가 일하는 회사는 공공조달용 예측 시스템을 만들었다. 시민 상담 배정, 민원 우선순위, 위험 신고 분류, 복지 자격 예비 판정 같은 것을 자동화했다. 페르소나는 회사의 공식 제품은 아니었지만, 회사 문화를 가능하게 하는 기초 인프라였다.

오전 회의에서 권 팀장은 완벽한 안색으로 말했다.

“이번 분기 성과는 안정적입니다. 고객기관 쪽에서 설명 가능성 문서를 조금 더 요구하고 있습니다.”

그의 페르소나는 ‘조금 더’라는 표현에 담긴 분노를 제거했다. 개발자들은 그 분노를 눈치채지 못했다. 또는 눈치챘다는 사실을 드러내지 않았다. 모두 같은 차단막 안에서 서로의 감정을 사회적으로 유용한 형태로 통과시켰다.

“하준 씨, 어제 보낸 패치 쪽에서 오류율이 아직 남아 있던데요.”

“확인했습니다. 제 쪽에서 오늘 오전 안에 정리하겠습니다.”

하준은 자연스럽게 대답했다. 실제로는 그 오류가 기획 변경 때문에 생겼고, 권 팀장이 전날 오후 회의에서 기준값을 바꾼 탓이라는 생각이 올라왔다. 페르소나는 그 생각을 책임 회피성 반응으로 분류해 낮췄다. 목소리에는 협조성이 남았다.

권 팀장은 고개를 끄덕였다.

“좋습니다. 역시 믿고 맡길 수 있네요.”

믿고 맡길 수 있다.

그 말이 회의실 공기 중에 정확히 놓였다. 하준은 그 말을 받으며 갑자기 이상한 어지러움을 느꼈다. 권 팀장은 하준을 믿고 있을까. 믿는다는 문장을 조직 안정성에 맞게 발화했을까. 둘의 차이는 어디에 기록되는가. 회의록에는 후자만 남았다. 법적으로도 후자만 의미가 있었다.

신뢰는 한때 내면의 상태를 가리키는 말이었다고 들었다. 지금 신뢰는 예측 가능한 절차 준수에 더 가까웠다. 하준이 거짓 충성의 문장을 안정적으로 산출하고, 권 팀장이 거짓 격려의 문장을 안정적으로 제공하면, 두 사람은 서로를 신뢰할 수 있었다. 적어도 조직은 그렇게 작동했다.

점심시간에 동료 서린이 다가왔다.

“요즘 괜찮아요?”

하준은 그녀의 얼굴을 보았다. 서린의 눈썹은 걱정에 알맞은 각도로 내려가 있었다. 입가에는 침범하지 않는 배려가 걸려 있었다. 만약 페르소나가 없다면 그녀는 지루해하고 있을지도 몰랐다. 귀찮아하고 있을지도 몰랐다. 또는 정말로 걱정하고 있을 수도 있었다. 세 가능성은 같은 표정으로 도착했다.

“괜찮습니다.”

“말이 필요하면 언제든요.”

“고마워요.”

서린은 더 묻지 않았다. 잘 훈련된 사람은 상대의 방어선을 손가락으로 두드리지 않았다. 그 배려가 하준에게는 갑자기 모욕처럼 느껴졌다. 그는 누군가 자신에게 거칠게 묻기를 바랐다. “너 지금 엉망이지?” 하고. 하지만 그 말은 직장 내 무필터 접촉 신고 대상이 될 수 있었다. 상대의 내면 상태를 허락 없이 추정하고 발화하는 것은 정서적 침입으로 분류되었다.

오후에 사내 윤리교육 영상이 재생되었다.

“페르소나는 거짓말을 허용하는 장치가 아닙니다. 페르소나는 내면을 보호하면서 공동 행위를 가능하게 하는 사회계약의 인터페이스입니다. 우리는 타인의 진심을 소유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다만 서로가 합의한 형식을 신뢰합니다.”

하준은 영상 속 상담사가 손을 겹쳐 놓는 모습을 보았다. 너무 안정적인 손이었다.

그날 퇴근 전, 권 팀장이 하준을 불렀다.

“요즘 집중도가 조금 흔들리는 것 같습니다. 장치 점검을 받아보는 건 어떨까요?”

“필요하면 받겠습니다.”

“불이익은 없습니다. 우리는 내면을 묻지 않습니다. 다만 협업 신호가 흐트러지면 팀 전체가 불안정해집니다.”

권 팀장은 진심으로 걱정하고 있을 수도 있었다. 팀 성과만 걱정하고 있을 수도 있었다. 하준은 그 둘을 구별할 방법이 없었다. 구별할 방법이 없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면 모든 것이 평화로웠다. 받아들이지 못하는 순간, 평화는 부드러운 감금이 되었다.

퇴근길 지하철에서 하준은 손가락으로 귀밑 장치를 만졌다. 페르소나는 체온과 거의 같았다. 그는 자신의 살과 장치의 경계를 찾으려 했다. 손끝에는 매끄러운 표면만 닿았다.

3. 조정실

하준은 예약 없이 시민관계조정센터를 찾았다. 센터 로비에는 낮은 음악이 흐르고 있었다. 벽면에는 민원 안내가 붙어 있었다.

무필터 접촉 피해 상담
상호 조정 서약 분쟁
비착용자 접촉 불안
가족 간 진실 요구 조정
증언 일관성 보조 신청

하준은 접수기에 자신의 증상을 입력했다. ‘타인의 발화를 견디기 어려움’, ‘관계 내 확인 욕구 증가’, ‘페르소나 신호 불신’, ‘무가공 진실 충동’. 접수기는 잠시 멈춘 뒤 진료가 아닌 조정 항목을 추천했다.

그를 만난 사람은 상담사보다 법률 조정관에 가까웠다. 이름은 이림이었다. 회색 정장을 입고 있었고, 목소리는 관공서 문장처럼 깨끗했다. 귀밑 장치는 공공기관용 투명 모델이었다. 빛이 거의 새지 않았다.

“하준 씨는 현재 페르소나 자체를 불신하는 것이 아니라, 페르소나가 만든 관계의 인식 조건을 견디기 어려운 상태로 보입니다.”

하준은 웃음이 나오려는 것을 참았다. 조정관의 문장은 정확했다. 너무 정확해서 그 안에 머물 곳이 없었다.

“제가 알고 싶은 건 단순합니다.”

“말씀하세요.”

“누군가 나를 사랑한다고 할 때, 그 말을 믿는다는 게 뭡니까?”

이림은 곧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침묵에도 훈련이 들어 있었다. 상대가 질문을 돌려받았다고 느끼지 않게 하는 길이였다.

“그 사람이 페르소나를 정상적으로 착용하고 있고, 관계상 요구되는 조정 기준을 위반하지 않았으며, 반복적으로 같은 방향의 행위를 제공한다면 신뢰할 수 있습니다.”

“그건 진실이 아닙니다.”

“진실이라는 말을 어떻게 쓰고 계신가요?”

하준은 입을 다물었다.

조정관은 태블릿을 돌려 보여주었다. 화면에는 시민관계기본법의 조항이 열려 있었다.

제14조. 누구든지 타인에게 내면의 원자료를 요구할 수 없다.
제15조. 정서적 발화는 수신자의 감당 가능성을 고려하여 조정되어야 한다.
제22조. 페르소나 착용 상태에서 이루어진 진술은 절차 위반이 없는 한 유효한 사회적 발화로 본다.

“법정에서도 그렇습니까?”

“증언의 내면적 진실성은 판단하지 않습니다. 절차 준수, 진술 일관성, 외부 증거와의 정합성을 봅니다.”

“거짓말도 유효합니까?”

“거짓말이라는 말이 예전과 같은 법적 의미를 갖는 영역은 줄었습니다. 사기, 강요, 계약상 중요 사항 은폐처럼 손해와 권한 침해가 발생하는 경우는 다릅니다. 관계 발화에서는 내면 일치가 요구 사항이 아닙니다.”

하준은 손을 무릎 위에 올려놓았다. 손바닥에 땀이 배었다. 페르소나는 발한 신호를 낮췄다. 자신의 불안까지 자기에게서 멀어지는 느낌이 들었다.

“그럼 사랑한다는 말은 뭡니까?”

“관계 유지 의사를 사회적으로 수용 가능한 방식으로 제공하는 발화입니다.”

“그 안에 사랑이 없어도?”

“하준 씨가 원하는 사랑은 어떤 형태로 검증됩니까?”

그 질문은 공격적이지 않았다. 그래서 더 불편했다.

하준은 민서의 목소리를 떠올렸다. “나는 너를 사랑해.” 완벽하게 조정된 문장. 그 문장은 거짓일 수 있었다. 진실일 수도 있었다. 문제는 둘이 같은 방식으로 들린다는 점이었다.

“저는 상대의 내면을 소유하고 싶은 게 아닙니다.”

“그렇게 느끼실 수 있습니다.”

“정말입니다.”

“저는 하준 씨의 의도를 판정하지 않습니다. 다만 무가공 진실 요구는 친밀성의 이름으로 타인의 안전지대를 침범할 수 있습니다. 많은 폭력이 ‘나는 진짜를 원했을 뿐’이라는 문장으로 시작됩니다.”

하준은 그 문장을 싫어했다. 싫어하는 감정이 즉시 내부에서 둥글게 다듬어졌다. 페르소나는 상담 상황의 공격성을 낮추고 있었다.

“그럼 우리는 끝까지 서로의 안쪽을 모른 채 살아야 합니까?”

이림은 고개를 조금 기울였다.

“원래 그랬습니다.”

하준은 그 말을 듣고 처음으로 조정관을 똑바로 보았다.

“페르소나 이전에도 타인의 안쪽은 완전히 주어지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표정, 습관, 말, 반복되는 선택을 통해 타인을 구성했습니다. 페르소나는 불투명성을 만든 장치가 아닙니다. 불투명성을 더 이상 진실이라는 이름으로 덮지 않게 만든 장치에 가깝습니다.”

“그게 더 정직하다는 말입니까?”

“적어도 타인이 완전히 열릴 수 있다는 환상을 줄입니다.”

“그 환상이 있어야 버틸 수 있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럴 수 있습니다. 그래서 여기 오신 거겠지요.”

하준은 의자 팔걸이를 붙잡았다. 조정관의 말에는 비난이 없었다. 그 무비난이 그를 더 외롭게 만들었다. 비난이 있다면 싸울 수 있었다. 여기에는 싸울 적이 없었다. 제도는 그를 배척하지 않았다. 다만 그가 요구하는 것을 타인에게 요구할 수 없다고 차분히 알려주었다.

“페르소나를 끄면 어떻게 됩니까?”

“공공장소에서 비착용 상태로 정서적 발화를 시도하면 경고가 뜹니다. 사적 공간에서는 상대의 동의가 필요합니다. 동의 없는 무필터 고백은 신고될 수 있습니다.”

“연인에게도요?”

“가장 많이 발생하는 신고가 연인 사이입니다.”

이림은 잠시 멈췄다.

“하준 씨가 원하는 것은 진실일 수 있습니다. 동시에 상대에게는 침입일 수 있습니다. 둘은 같은 사건 안에 함께 있을 수 있습니다.”

하준은 그날 센터를 나와 오래 걸었다. 거리에는 페르소나 충전소가 편의점보다 많았다. 광고판에서는 한 노인이 성년이 된 손녀에게 장치를 건네고 있었다.

이제 너의 마음은 너의 것이야.

하준은 그 문장을 보고 오래 서 있었다. 마음이 자기 것이라면, 왜 그는 자신의 말조차 자기 것처럼 느끼지 못하는가. 페르소나가 그의 거짓을 대신 만들어 주기 때문일까. 말이라는 것이 처음부터 혼자만의 것이 아니었기 때문일까.

그는 답을 얻지 못했다. 대신 손가락이 다시 귀밑으로 올라갔다.

4. 장치 파괴

그날 새벽, 하준은 욕실 불을 켜지 않았다. 거울 위 작은 간접등만 켰다. 푸른 빛 아래 그의 얼굴은 물속에 잠긴 사람처럼 보였다.

민서는 자고 있었다. 하준의 집에 남겨둔 칫솔이 컵 안에 기울어져 있었다. 그 사소한 물건이 이상하게 무거웠다. 함께 산다는 증거도, 떠나지 않겠다는 약속도, 다만 다음 방문의 편의를 위한 물건. 그럼에도 하준은 그것을 볼 때마다 관계가 아직 계속되고 있다고 느꼈다.

그는 세면대 위에 작은 공구 상자를 올렸다. 예전에 페르소나 외피 교체용으로 받은 키트였다. 장치 자체를 분해하는 것은 권장되지 않았다. 불법은 아니었다. 자기 장치를 폐기할 권리는 있었다. 하지만 폐기 이후 타인과 접촉하는 방식에는 책임이 따랐다. 모든 권리는 접촉 순간에 의무로 바뀌었다.

하준은 귀밑을 소독솜으로 닦았다. 페르소나는 피부에 붙어 있는 막처럼 보였지만, 미세한 신경 접속부가 있었다. 성년 배급식 때 그는 거의 통증을 느끼지 않았다. 국가 배급 기술은 훌륭했다. 열아홉 살의 하준은 장치를 받으며 어른이 되었다고 느꼈다. 그때 사회윤리관은 말했다.

“오늘부터 여러분은 자기 진실을 보호할 권리를 갖습니다. 동시에 타인이 감당할 수 있는 언어를 제공할 의무를 갖습니다.”

그는 그 문장을 자랑스럽게 들었다. 오래전 사람들은 화가 난 얼굴을 그대로 들이밀고,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확인을 요구하고, 가족이라는 이름으로 속을 캐물었다고 배웠다. 페르소나 이후 폭력 사건은 줄었다. 이혼 조정은 짧아졌다. 직장 내 갈등 비용은 감소했다. 법정 증언의 일관성은 높아졌다. 누구도 옛날로 돌아가고 싶어 하지 않았다.

하준도 돌아가고 싶은 것이 아니었다.

그는 정확히 어디로 가고 싶은지 몰랐다.

핀셋이 접속부를 건드리자 관자놀이 쪽에서 짧은 진동이 올라왔다. 장치는 안전 모드로 들어갔다. 거울에 안내 문구가 투사되었다.

비착용 상태는 사회적 오해를 유발할 수 있습니다.
장치 점검 또는 임시 휴지 상태를 선택하십시오.

하준은 확인 버튼을 누르지 않았다. 손톱으로 충전 단자를 눌렀다. 얇은 막이 일그러졌다. 안쪽에서 은색 실선들이 드러났다. 너무 정교해서 장난감처럼 보였다. 그는 그것이 자신의 거짓말을 만든 것이 아니라, 자신의 말이 타인에게 도착하는 방식을 관리했음을 알고 있었다. 그런데도 그 순간 그는 어떤 기관을 뜯어내는 느낌을 받았다.

단자를 부러뜨릴 때 소리는 작았다.

딱.

그 뒤 세상이 조용해졌다. 실제로 조용해진 것이 아니라, 늘 귀밑에서 울리던 미세한 보정음이 사라졌다. 하준은 그 소리를 평생 의식하지 못했다. 사라진 뒤에야 알았다. 자신에게는 늘 두 번째 피부의 숨소리가 있었다.

심장이 갑자기 크게 뛰었다. 너무 크게 뛰어서 욕실 벽이 들을 것 같았다. 숨을 들이마시자 코 안쪽이 마르고, 입술이 떨렸다. 페르소나는 더 이상 그 떨림을 적정 수준으로 낮추지 않았다. 거울 속 얼굴이 빠르게 붉어졌다. 하준은 수건으로 얼굴을 가렸다. 수치심이 올라왔다.

해방감은 없었다.

그는 자신의 몸이 지나치게 밖으로 나와 있다고 느꼈다. 눈동자의 흔들림, 목울대의 움직임, 입술의 작은 뒤틀림, 대답하기 전의 침묵까지 모두 노출된 신체 기관처럼 느껴졌다. 말하지 않아도 새어 나갔다. 인간의 얼굴이 이렇게 시끄러운 물건인지 그는 몰랐다.

하준은 부러진 장치를 휴지에 싸서 욕실 쓰레기통에 넣었다가 다시 꺼냈다. 쓰레기통은 너무 가정적이었다. 그는 외투를 입고 밖으로 나갔다. 새벽 거리는 젖어 있었다. 병원 뒤편 폐기물 수거함 앞까지 걸어가, 감염성 폐기물 통 옆 일반 전자폐기물 박스에 장치를 던졌다.

상자 안에서 아주 작은 충돌음이 났다.

그는 그 앞에 서서 한참 숨을 골랐다. 지나가던 청소 로봇이 그를 감지하고 우회했다. 로봇의 표면에는 경고 문구가 붙어 있었다.

무필터 상태의 시민을 응시하지 마십시오.
도움이 필요해 보이면 조정센터로 연결하십시오.

하준은 웃었다. 웃음이 거칠게 나왔다. 곧 울음처럼 바뀌었다. 아무도 그것을 조정하지 않았다. 그는 처음으로 자기 감정의 원자료를 들고 서 있었다. 그것은 진귀하지 않았다. 품위도 없었다. 끈적하고, 불규칙하고, 사용하기 어려운 것이었다.

집으로 돌아왔을 때 민서는 깨어 있었다.

거실 스탠드 하나가 켜져 있었다. 민서는 소파에 앉아 하준을 보고 있었다. 그녀의 귀밑에서 페르소나가 희미하게 빛났다.

“어디 갔다 왔어?”

하준은 대답하기 전에 목이 막혔다. 페르소나가 있으면 이 막힘은 적절한 침묵으로 정리되었을 것이다. 지금은 그냥 막힘이었다.

민서의 시선이 그의 귀밑에 멈췄다.

“하준아.”

그녀의 목소리는 낮아졌다. 경고와 걱정 사이의 정확한 지점. 장치는 여전히 훌륭했다.

“장치 어디 있어?”

하준은 대답했다.

“버렸어.”

민서의 표정이 거의 변하지 않았다. 그래서 하준은 그녀가 놀랐는지 알 수 없었다. 그러나 그녀의 손이 무릎 위에서 아주 조금 굳었다. 그 작은 움직임을 본 순간 하준은 이상한 기쁨을 느꼈다. 조정되지 않은 틈을 본 것 같았다. 곧바로 그 기쁨이 혐오스러워졌다. 그는 상대의 균열을 증거처럼 수집하고 있었다.

“지금 나한테 말하려는 거야?”

“응.”

“동의 절차부터 해.”

“민서야.”

“동의 절차부터 하라고.”

그 말은 단단했다. 페르소나가 단단하게 만든 것인지, 민서가 단단한 것인지 알 수 없었다.

하준은 그녀 앞에 섰다. 자신의 얼굴이 어떤 상태인지 몰랐다. 그래서 더 숨고 싶었다. 숨고 싶어서, 그는 말하기 시작했다.

5. 날것의 진실

“나는 네가 나를 사랑한다고 말할 때마다 그 말을 믿지 못했어.”

민서는 움직이지 않았다.

“네가 정말 사랑해도 같은 방식으로 말할 수 있고, 사랑하지 않아도 같은 방식으로 말할 수 있잖아. 그 두 가지가 내 앞에서는 구별되지 않아. 나는 네 말을 듣는 게 아니라, 네 장치가 관계를 망치지 않도록 처리한 결과를 받는 것 같았어.”

민서의 손이 소파 팔걸이에서 떨어졌다가 다시 놓였다.

“그만해. 지금은 절차가 없어.”

“절차를 통과하면 또 모르잖아.”

“네가 원하는 게 뭔데.”

그 질문은 하준을 향해 왔다. 이번에는 조정관의 질문과 달랐다. 하준은 그 안에 피로가 있기를 바랐다. 그 바람이 그를 더 비참하게 만들었다.

“나는 네가 나한테 질렸는지 알고 싶었어. 나랑 있을 때 지루한지, 내 말을 듣는 게 버거운지, 내 몸을 만질 때 습관인지, 네가 가끔 나를 돌보는 얼굴을 할 때 실제로는 네가 얼마나 멀리 가 있는지 알고 싶었어.”

민서는 입술을 다물었다.

“그리고 나도 말해야겠어. 내가 너를 사랑한다고 말한 순간들 속에도 깨끗한 건 별로 없었어. 나는 네가 떠나지 않기를 바랐고, 네가 나를 좋은 사람으로 봐주기를 바랐고, 혼자 남는 게 싫었고, 네가 나보다 안정적인 사람이라서 붙잡고 싶었어. 네가 울 때 위로하면서도, 내가 필요한 사람이 된 것 같아서 안심한 적이 있어. 네 슬픔을 걱정하면서 동시에 그 슬픔 안에서 내 자리를 확인했어.”

민서의 얼굴에서 아주 짧게 무언가 지나갔다. 하준은 그것을 놓치지 않으려 했다. 그는 자신의 말이 상처를 내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알면서도 멈추지 못했다. 멈추면 다시 모든 것이 조정 가능한 문장으로 돌아갈 것 같았다.

“네가 나한테 다정할 때마다 나는 그 다정함을 검사했어. 답장이 늦으면 네가 누구랑 있는지 상상했고, 네가 ‘괜찮아’라고 말하면 그 괜찮음이 몇 퍼센트짜리인지 생각했어. 네가 피곤해서 조용히 있는 날에도 나는 네 침묵을 내 쪽으로 끌고 와서 해석했어. 네가 정말 피곤한지, 나한테 식은 건지, 네 장치가 나를 배려해서 피로의 형태를 고른 건지.”

“하준아.”

민서의 목소리가 처음으로 낮게 갈라졌다. 페르소나는 그 갈라짐을 완전히 지우지 못했다. 하준은 그 미세한 틈을 보았고, 그것을 본 자신을 곧바로 미워했다.

“이게 네가 말하고 싶었던 진실이야?”

하준은 숨을 들이켰다.

“응.”

“나를 위해서?”

그는 대답하지 못했다.

민서는 웃지 않았다. 울지도 않았다. 그 점이 하준을 찔렀다. 그는 그녀가 무너지는 모습을 상상했었다. 차라리 화를 내고, 컵을 던지고, 그에게 잔인하다고 소리치기를 바랐다. 그러면 그의 고백은 사건이 될 수 있었다. 지금 민서는 사건이 되기를 거부하는 사람처럼 서 있었다.

“너는 방금 네 안의 것을 내게 버렸어.”

“버린 게 아니야. 숨기지 않은 거야.”

“그 차이를 네가 정할 수 있다고 생각해?”

하준은 입을 다물었다.

민서는 한 걸음 물러났다. 물러남은 작았지만 분명했다.

“네가 말한 것이 진실인지보다, 네가 그것을 아무 필터 없이 내게 던졌다는 사실이 더 중요하다.”

그 문장은 조정된 것처럼 정확했다. 그러나 정확하다고 해서 거짓은 아니었다. 하준은 이제 그 정도는 알았다. 정확한 말도 진실일 수 있었다. 거친 말도 도피일 수 있었다. 날것의 말이라고 해서 더 깊은 곳에서 나온다는 보장은 없었다. 날것은 그저 가공되지 않았다는 뜻일 뿐이었다.

민서가 말했다.

“나는 너에게 사랑을 제공했어. 가능한 방식으로. 네가 감당할 수 있는 방식으로. 나도 내가 가진 것을 전부 알지 못해. 나도 내가 사랑해서 한 말과 관계를 지키려고 한 말을 매번 구분하지 못해. 그런데 우리는 그 모호함을 서로에게 던지지 않기로 배웠어. 사람이 그걸 그대로 받으면 다치니까.”

하준은 그녀의 말 안에서 빈틈을 찾고 싶은 자신을 보았다. 그 습관은 페르소나가 만든 것이 아니었다. 장치 이전부터 그 안에 있었을 것이다. 장치는 그 습관이 밖으로 새어 나오지 않게 했을 뿐이다.

“그럼 우리는 뭘 믿은 거야?”

민서는 한참 대답하지 않았다. 침묵이 길어졌다. 그녀의 페르소나는 그 침묵을 어떤 의미로 포장하고 있을까. 또는 포장하지 않고 있을까. 하준은 알 수 없었다.

“아마도,” 민서가 말했다. “서로가 완전히 망가뜨리지 않는 방식으로 말해 줄 거라는 믿음.”

“그게 신뢰야?”

“나는 그렇게 배웠어.”

그녀는 가방을 집어 들었다. 하준은 막고 싶었지만 몸이 움직이지 않았다. 막는 순간 그는 다시 하나의 증거를 요구하는 사람이 될 것이다. 가지 말라는 말은 사랑일 수도 있고, 소유일 수도 있고, 공포일 수도 있었다. 셋은 같은 목소리로 나올 것이다. 이제 그에게는 그것을 조정해 줄 장치가 없었다.

현관 앞에서 민서는 멈췄다.

“신고는 안 할게.”

그 말은 친절일까. 마지막 보호일까. 피로한 절차 회피일까. 하준은 고개를 끄덕였다.

민서는 문을 열었다가 다시 돌아보았다. 그녀의 귀밑에서 페르소나가 아주 부드럽게 빛났다. 하준은 그 빛을 증오하지 못했다. 그 빛은 그녀가 그를 속이기 위해 켠 것이 아닐 수 있었다.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그를 더 다치게 하지 않기 위해, 둘 사이에 남은 형식을 마지막으로 붙잡기 위해 켜진 것일 수 있었다.

“하준아.”

그녀는 말했다.

“너는 지금 아주 아파 보여.”

그 말은 완벽하게 부드러웠다. 너무 부드러워서 하준은 다시 무너질 뻔했다. 그는 그 말이 진심인지, 관계를 안전하게 끝내기 위한 조정문인지, 신고하지 않겠다는 사후 책임의 문장인지 확인할 수 없었다. 확인할 수 없다는 사실이 이제는 이전과 조금 다르게 다가왔다.

그는 처음으로 생각했다. 확인 불가능성은 페르소나가 만든 감옥만은 아닐지 모른다. 타인은 원래 그런 방식으로만 문 앞에 서 있었는지도 모른다. 예전의 사람들은 그 어둠을 진실이라는 말로 덮었고, 지금의 사람들은 조정이라는 말로 관리했다. 어느 쪽도 타인의 안쪽을 열어 주지는 못했다.

민서가 나간 뒤, 현관문은 조용히 닫혔다.

하준은 거실에 혼자 남았다. 귀밑 피부가 허전했다. 심장은 아직 크게 뛰었고, 입안은 말라 있었다. 그는 방금 자신이 처음으로 진실을 말했는지 생각했다. 또는 처음으로 상대를 고려하지 않는 방식으로 자신을 배출했는지 생각했다.

창밖에서 새벽 배송 드론이 지나갔다. 거리는 곧 아침이 될 준비를 하고 있었다. 성년이 된 아이들은 오늘도 어딘가에서 페르소나를 받을 것이다. 누군가는 안도하고, 누군가는 자랑스러워하고, 누군가는 자신에게 생긴 권리를 아직 이해하지 못한 채 귀밑의 작은 빛을 만질 것이다.

하준은 민서가 놓고 간 칫솔을 보았다. 컵 안에서 그것은 여전히 기울어져 있었다. 증거처럼 보였지만 아무것도 증명하지 않았다.

그는 손을 뻗어 칫솔을 바로 세웠다. 그리고 한참 뒤, 자신이 그 작은 정리를 누구에게 보여 주고 싶었는지 알 수 없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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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안 작성: ChatGPT · GPT-5.5 Thinking · 높음 검토·개고: ChatGPT · GPT-5.5 Thinking · 높음

작성일: 2026년 6월 12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