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어나기 전의 원고¶
법정에 들어서기 전, 그는 신분 확인을 세 번 거쳤다.
첫 번째 문은 그의 홍채를 읽었다. 두 번째 문은 손바닥의 정맥 지도를 확인했다. 세 번째 문은 입 안쪽 점막에서 채취한 세포를 몇 초간 분석했다. 유리벽 안쪽에서 초록빛이 켜졌다.
신원 확인 완료.
박이현.
출생 등록 번호 일치.
유전체 개입 이력 존재.
그 문장은 늘 그를 따라다녔다.
유전체 개입 이력 존재.
그는 서른두 살이었다. 키는 백팔십칠 센티미터였고, 안정시 심박수는 낮았고, 혈관 나이는 실제 나이보다 열두 살 젊었다. 병원에서는 그를 “장기 예후 우수군”으로 분류했다. 보험사는 그에게 할인 등급을 주었다. 회사의 건강검진 앱은 해마다 같은 문장을 띄웠다.
예측 건강 점수: 상위 2.7%.
주의력 지속 지표: 상위 1.4%.
심혈관 위험도: 낮음.
충동 조절 지표: 안정.
그는 그 숫자들을 볼 때마다 자기 몸이 아니라 누군가의 납품 평가서를 읽는 기분이 들었다.
재판정 앞 복도에는 이미 기자들이 줄지어 있었다. 카메라 렌즈가 그를 향해 몸을 틀었다. 어떤 기자는 그를 “완성형 인간의 첫 소송”이라고 불렀고, 어떤 기자는 “디자이너 베이비 1세대의 반란”이라고 불렀다. 그는 그 말들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완성형이라는 말에는 결함을 허락하지 않는 냄새가 있었고, 반란이라는 말에는 그가 부모를 증오한다는 단순한 서사가 묻어 있었다.
그는 부모를 증오하지 않았다.
그 점이 오히려 사건을 더 어렵게 만들었다.
“박이현 씨.”
변호사 한서윤이 다가왔다. 그는 검은 정장 안쪽에 얇은 회색 스웨터를 입고 있었다. 법정 변호사라기보다 오래된 도서관에서 막 나온 사람처럼 보였다. 그는 이현의 손에 들린 서류 봉투를 보았다.
“원본입니까?”
“공증 사본입니다.”
“원본은 회사가 가지고 있죠?”
“네.”
“오늘은 사본이면 충분합니다.”
이현은 봉투를 내려다보았다. 겉면에는 아버지의 글씨가 남아 있었다.
이현이 관련 서류.
20세 이후 열람 가능.
아버지는 그의 스무 번째 생일에 이 봉투를 건넸다. 그날 저녁에는 케이크가 있었고, 어머니가 끓인 미역국이 있었고, 오래된 가족사진들이 식탁 위에 흩어져 있었다. 그는 자신이 입양되었다는 말을 들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부모의 표정이 너무 조심스러웠기 때문이다.
아버지는 봉투를 밀어주며 말했다.
“네가 알 권리가 있다고 생각했다.”
이현은 그 자리에서 봉투를 열지 않았다.
일주일 뒤 혼자 사는 방에서 처음 봉투를 열었다. 가장 위에는 계약서가 있었다. 제목은 건조했다.
배아 단계 유전체 위험 조정 및 표현형 최적화 서비스 계약서
그 아래 부모의 서명이 있었다. 그 아래 병원 책임자의 서명이 있었다. 그 아래 회사의 붉은 직인이 있었다.
그는 한참 동안 제목만 보았다.
자신의 탄생은 사랑의 결과라고 배웠다. 신앙을 가진 사람들은 신의 뜻이라고 말했고, 생물학 교사는 정자와 난자의 결합이라고 말했고, 어머니는 “너는 오래 기다려서 온 아이”라고 말하곤 했다.
계약서는 네 번째 문장을 추가했다.
그는 합의된 결과였다.
법정 문이 열렸다.
방청석은 이미 가득 차 있었다. 앞줄에는 생명윤리 단체 사람들이 앉아 있었고, 그 뒤에는 유전자 편집 기술을 지지하는 부모 모임이 있었다. 어떤 사람들은 작은 배지를 달고 있었다.
질병 없는 출생은 권리다.
다른 쪽 사람들은 흰 종이를 들고 있었다.
미래 아이는 상품이 아니다.
이현은 어느 쪽 문장에도 완전히 들어갈 수 없었다.
그는 질병 없는 몸을 가지고 있었다. 동시에 상품 설명서가 붙은 몸을 가지고 있었다.
재판장은 정면 높은 자리에 앉아 있었다. 머리가 희끗한 여성이었다. 이름표에는 정민경이라고 적혀 있었다. 그는 서류를 넘기며 방청석이 조용해질 때까지 기다렸다.
“사건 번호 2046가합1182. 원고 박이현. 피고 오리진라이프 주식회사 외 2인.”
정 판사가 안경을 고쳐 썼다.
“청구 취지는 부모와 피고 회사 사이에 체결된 출생 전 유전체 편집 계약의 효력 범위 확인, 원고 인격권 침해 확인, 피고 회사의 계약상 권위 주장 금지 및 손해배상입니다. 원고 측, 맞습니까?”
한서윤이 일어섰다.
“맞습니다.”
피고석에는 세 사람이 앉아 있었다. 오리진라이프의 법무팀장, 병원 측 대리인, 그리고 부모 측 대리인이었다. 부모는 피고석 뒤편에 따로 앉아 있었다. 아버지는 양손을 모아 쥐고 있었고, 어머니는 이현을 보지 않았다.
정 판사가 말했다.
“먼저 확인하겠습니다. 원고는 계약 자체의 물리적 취소를 구하는 것이 아닙니다. 유전체 편집의 생물학적 복원을 요구하는 것도 아닙니다.”
한서윤이 대답했다.
“맞습니다.”
“그렇다면 이 사건에서 법원이 판단할 핵심은, 원고가 태어나기 전에 부모와 회사가 체결한 계약이 원고의 현재 인격과 장래 자기해석권에 어느 정도의 법적 효력을 주장할 수 있는가입니다.”
그 말이 법정 공기 속에 오래 남았다.
현재 인격.
장래 자기해석권.
이현은 자기 이름보다 그 말들이 더 낯설게 느껴졌다.
피고 측 변호사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름은 윤태겸이었다. 그는 매끄러운 회색 양복을 입고 있었다. 목소리는 낮고 안정되어 있었다.
“재판장님, 피고 회사는 원고를 제품으로 취급한 적이 없습니다. 이 사건 계약은 난임으로 오랜 고통을 겪은 부모에게 생식 보조와 중대한 질병 예방 서비스를 제공한 의료 계약입니다. 원고는 현재 건강한 성인입니다. 계약으로 인해 입은 구체적 손해가 무엇인지 원고 측은 입증해야 합니다.”
그는 잠시 이현을 바라보았다.
“원고는 자신이 더 건강하고, 더 안정적이고, 더 긴 수명을 기대할 수 있다는 사실을 피해로 주장하고 있습니다. 이는 법이 손해라고 인정할 수 있는 범주를 넘어섭니다.”
방청석 한쪽에서 낮은 웅성거림이 일었다.
정 판사가 나무망치를 가볍게 두드렸다.
“방청석은 정숙하십시오.”
윤태겸은 계속 말했다.
“부모는 자녀의 최선의 이익을 위해 결정합니다. 예방접종, 수술, 교육, 거주지, 언어 환경, 식습관 모두 아이의 사전 동의 없이 결정됩니다. 이 사건의 부모는 당시 가능한 의학적 정보 안에서 아이의 질병 위험을 줄이고 삶의 기회를 넓히려 했습니다. 이것을 사후적으로 불법이라고 선언한다면, 모든 부모의 의료적 대리 결정이 불안정해집니다.”
그 문장은 강했다.
이현도 그 문장을 부정할 수 없었다. 그는 어릴 때 천식 위험군이 아니었다. 청소년기에 심장 검사를 받아본 적도 없었다. 부모가 그를 위해 많은 것을 했다는 사실은 분명했다.
그는 그 사실 때문에 오래 소송을 미뤘다.
어머니가 자신을 안고 잠들었던 밤들. 아버지가 병원 복도에서 새벽까지 기다렸던 기억. 가족 여행에서 찍은 사진들. 시험을 망치고 집에 돌아왔을 때, “괜찮다”고 말하던 어머니의 목소리.
그 기억들은 계약서와 함께 사라지지 않았다.
사랑은 있었다.
그 사랑의 아래쪽에 서명이 있었다.
정 판사가 원고 측을 보았다.
“원고 본인 진술을 듣겠습니다.”
한서윤이 이현에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현은 천천히 일어섰다. 법정의 모든 눈이 그를 향했다. 카메라는 촬영할 수 없었지만, 그는 렌즈보다 더 차가운 시선들을 느꼈다.
“성명.”
“박이현입니다.”
“나이.”
“서른두 살입니다.”
“직업.”
“인지 인터페이스 설계 회사에서 일합니다.”
정 판사가 서류를 내려놓았다.
“원고는 자신이 어떤 피해를 입었다고 생각합니까?”
이현은 준비한 문장을 떠올렸다. 변호사와 여러 차례 연습한 문장이 있었다. 유전체 편집 계약은 원고의 장래 자기결정권을 침해했고, 부모의 대리권 범위를 초과했으며, 피고 회사는 원고의 인격 형성 조건을 상품화했다.
그는 그 문장들을 말할 수 있었다. 정확하고 안전한 문장들이었다.
그러나 입 밖으로 나온 말은 달랐다.
“저는 피해가 어디 있는지 오래 찾았습니다.”
법정이 조용해졌다.
“처음에는 병원 기록을 봤습니다. 거기에는 피해가 없었습니다. 저는 건강합니다. 피고 회사가 제출한 자료도 봤습니다. 거기에도 피해가 없었습니다. 오히려 성공 사례라고 되어 있었습니다. 부모님도 저를 해치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저는 오랫동안 제가 소송을 제기할 자격이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는 부모가 앉은 쪽을 보지 않았다.
“그런데 어느 날 거울을 보다가, 제가 제 얼굴을 보고 있지 않다는 걸 알았습니다.”
정 판사가 물었다.
“그게 무슨 뜻입니까?”
“저는 제 얼굴을 보지 않습니다. 얼굴 비율 조정 항목을 봅니다.”
그는 손가락으로 자기 광대뼈 근처를 가리켰다.
“어머니는 제 눈매가 아버지를 닮았다고 말했습니다. 아버지는 제 턱선이 외가 쪽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런데 계약서에는 얼굴 대칭성, 악안면 성장 예측, 사회적 선호도 기반 비율 조정이라는 항목이 있습니다. 저는 어느 날부터 가족의 얼굴을 닮은 게 아니라, 납품된 얼굴을 가진 것처럼 느끼기 시작했습니다.”
피고 측 변호사가 즉시 일어났다.
“이의 있습니다. 주관적 감정입니다.”
정 판사가 고개를 조금 기울였다.
“기각합니다. 이 사건의 손해 주장에는 자기 이해의 변형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원고는 계속 진술하십시오.”
이현은 숨을 고르게 들이마셨다.
“저는 우울할 때 제 우울을 믿지 못합니다. 분노가 약하게 지나가면 제가 성숙한 건지, 분노 반응이 조정된 건지 묻습니다. 일을 오래 할 때도 그렇습니다. 사람들이 저를 집중력이 좋다고 칭찬하면, 저는 제 의지를 칭찬받는 건지, 계약 항목이 잘 작동한다는 평가를 받는 건지 구분하지 못합니다.”
그는 잠시 멈추었다.
“제가 다른 유전자를 원했다는 뜻은 아닙니다. 그런 저는 존재한 적이 없습니다. 저는 편집되지 않은 저를 기억하지 못합니다. 비교할 원본도 없습니다.”
그 말이 나오자 법정 안의 공기가 조금 달라졌다.
원본.
그 단어는 사건의 한가운데 놓여 있었지만, 아무도 쉽게 입에 올리지 못한 단어였다.
“제가 요구하는 건 원래 몸을 돌려달라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 몸은 법정에도, 병원에도, 기억에도 없습니다. 저는 다만 부모님과 회사가 제 삶을 위해 내렸던 결정이 제 삶 전체를 끝까지 해석할 권리를 갖지는 않는다고 확인받고 싶습니다.”
정 판사가 물었다.
“원고가 말하는 ‘해석할 권리’란 무엇입니까?”
이현은 봉투에서 계약서 사본을 꺼냈다. 종이는 여러 번 접혔다 펴진 흔적이 있었다.
“계약서에는 이렇게 적혀 있습니다.”
그는 한 문장을 읽었다.
“‘본 서비스의 결과로 발생하는 표현형 개선 효과는 예측 모델의 범위 내에서 제공되며, 장래 사회적·정서적·직업적 적응성 향상 가능성을 포함한다.’”
그는 고개를 들었다.
“저는 이 문장 속에서 태어나기 전에 이미 직업적 적응성을 가진 존재로 처리되었습니다. 태어나기 전에 이미 사회적으로 잘 적응해야 하는 사람으로 계약되었습니다. 저는 아직 울지도 못했고, 거절하지도 못했고, 이름도 없었는데, 누군가 제가 잘 적응할 사람이어야 한다고 서명했습니다.”
부모석에서 어머니가 고개를 숙였다.
이현은 처음으로 어머니를 보았다.
그 얼굴에는 죄책감보다 더 복잡한 것이 있었다. 오래된 사랑이 자기 자신을 방어하지 못할 때 생기는 표정이었다.
오전 재판은 거기서 끝났다.
점심시간에 이현은 법원 지하 식당에 가지 않았다. 그는 건물 밖 계단에 앉아 커피를 마셨다. 햇빛은 밝았고, 기자들은 접근 금지선 너머에서 그를 촬영했다. 휴대폰에는 메시지가 쌓였다.
힘내. 네가 맞아.
너 같은 사람 때문에 우리 애 치료가 막히면 책임질 거야?
건강하게 태어난 게 그렇게 억울하냐?
우리 딸도 유전자 치료 기다리고 있어. 너는 배부른 소송 하는 거야.
그는 마지막 메시지를 오래 보았다.
배부른 소송.
그 말이 아주 틀리지는 않았다. 그는 살아 있었다. 건강했다. 부모가 선택하지 않았다면 태어나지 못했을 수도 있었다. 난임 기록에는 냉동 보관된 배아 세 개 중 두 개가 생존 가능성이 낮았다고 되어 있었다. 그중 하나는 착상 전에 폐기되었다. 다른 하나는 자연 유산되었다.
남은 하나가 그였다.
의학 기록은 그를 “선별된 고생존 배아”라고 불렀다.
어릴 때 그는 그 사실을 몰랐다. 그는 자신이 특별히 선택받은 아이라고 믿은 적도 없고, 버려질 수 있었던 배아라고 생각한 적도 없었다. 그는 그냥 아이였다. 운동장에서 넘어지고, 수학 문제를 싫어하고, 잠들기 전 어머니에게 물을 달라고 부르던 아이였다.
계약서는 그 평범함을 사후적으로 바꾸었다.
그의 어린 시절은 더 이상 어린 시절만으로 남지 않았다. 모든 것이 징후가 되었다.
다섯 살 때 블록을 세 시간 동안 조립했던 일.
초등학교 때 싸움이 붙어도 먼저 화를 내지 않았던 일.
중학교 때 밤새 과학 경시대회 준비를 하면서도 피곤함을 잘 참았던 일.
예전에는 성격이었다.
이제는 항목이었다.
오후 재판에는 어머니가 증인석에 앉았다.
그녀의 이름은 오연주였다. 초등학교 교사였고, 이현을 낳을 때 마흔한 살이었다. 그는 증인 선서를 하면서 손을 조금 떨었다.
한서윤이 먼저 물었다.
“증인은 원고가 태어나기 전 오리진라이프와 유전체 편집 계약을 체결했습니까?”
“네.”
“계약서 내용을 충분히 이해했다고 생각했습니까?”
오연주는 바로 대답하지 못했다.
“그때는 이해했다고 생각했습니다.”
“지금은 어떻습니까?”
“지금은…… 모르겠습니다.”
피고 측 변호사가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녀가 흔들리면 피고들에게도 좋지 않았다. 그러나 그녀는 이미 오래전부터 흔들리고 있었던 사람처럼 보였다.
한서윤이 물었다.
“왜 계약을 체결했습니까?”
오연주는 손등을 바라보았다.
“아이를 갖기 어려웠습니다. 여러 번 실패했습니다. 유산도 했습니다. 병원에서는 나이가 있어서 위험이 크다고 했습니다. 남편 쪽 가족력에 심혈관 질환이 있었고, 제 쪽에는 우울증 병력이 있었습니다. 의사는 위험을 줄일 방법이 있다고 했습니다.”
“처음 제안받은 것은 질병 위험 감소였습니까?”
“네.”
“그 뒤에 향상 항목이 추가되었습니까?”
오연주는 입술을 눌렀다.
“상담 과정에서 패키지를 설명받았습니다. 처음엔 병을 막는 것만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상담사가 말했습니다. 아이가 태어난 뒤 세상은 더 경쟁적일 거라고요. 스트레스에 강하고, 집중력이 좋고, 사회적으로 안정된 아이가 더 잘 살아갈 거라고 했습니다.”
“그 말을 듣고 어떻게 느꼈습니까?”
“무서웠습니다.”
“무엇이 무서웠습니까?”
“우리가 해주지 않으면, 아이에게 일부러 불리한 조건을 남겨두는 부모가 되는 것 같았습니다.”
이현은 어머니의 목소리를 들으며 눈을 감았다.
그는 처음으로 어머니가 계약서를 작성하던 날을 상상했다. 흰 상담실. 유리컵에 담긴 물. 태블릿 화면 위의 그래프. 파란색과 초록색으로 표시된 위험 감소율. 의학 용어를 부드럽게 바꾸는 상담사의 목소리.
아이는 더 건강할 수 있습니다.
아이는 더 안정적일 수 있습니다.
아이는 더 좋은 기회를 가질 수 있습니다.
그 문장들은 사랑하는 사람에게 거절하기 어려운 형태로 다가왔을 것이다.
한서윤이 계약서 일부를 화면에 띄웠다.
정서 안정성 조정
충동 반응 완화
수면 리듬 최적화
주의 지속성 강화
사회적 선호 기반 안면 비율 조정
예상 노동 능력 지표 개선
“증인은 이 항목들이 모두 치료라고 생각했습니까?”
오연주는 화면을 보지 않았다.
“그때는…… 아이가 덜 힘들게 살 수 있게 해주는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지금은요?”
그녀의 눈에 물이 고였다.
“지금은 제가 아이를 도운 건지, 아이가 되어야 할 모습을 미리 정한 건지 모르겠습니다.”
피고 측 변호사 윤태겸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반대신문 하겠습니다.”
정 판사가 허락했다.
윤태겸은 오연주 앞으로 천천히 다가갔다.
“증인, 원고를 사랑하십니까?”
한서윤이 즉시 일어섰다.
“이의 있습니다. 감정적 질문입니다.”
윤태겸은 재판장을 보았다.
“부모의 대리 결정이 아이의 최선의 이익을 위한 것이었는지 판단하기 위해 필요합니다.”
정 판사가 잠시 생각했다.
“허용합니다. 답변하십시오.”
오연주는 이현을 보았다.
“사랑합니다.”
그 단어가 법정에 놓였다. 어떤 계약 조항보다 단순하고, 어떤 법률 용어보다 무거웠다.
윤태겸이 물었다.
“증인은 원고가 태어나지 않기를 바랐습니까?”
“아니요.”
“원고가 병을 갖고 태어나기를 바랐습니까?”
“아니요.”
“원고가 우울증, 심혈관 질환, 수면 장애, 충동 조절 문제를 겪기를 바랐습니까?”
“그런 걸 바라는 부모는 없습니다.”
“증인은 당시 가능한 정보와 기술을 사용해 원고에게 더 나은 삶의 조건을 주려고 했습니까?”
오연주는 한참 침묵했다.
“네.”
윤태겸은 배심원 없는 법정에서 방청석을 향해 말하는 사람처럼 몸을 돌렸다.
“감사합니다.”
그는 자리로 돌아가며 덧붙였다.
“피고 회사의 계약은 부모의 사랑을 대체하지 않았습니다. 부모가 아이를 위해 선택할 수 있는 의료적 가능성을 제공했을 뿐입니다.”
이현은 그 문장이 어머니를 보호하는 동시에 자신을 가두는 방식으로 작동한다는 것을 느꼈다.
사랑이 있었다.
그러므로 계약은 무해했다.
이 논리는 너무 부드러워서 더 위험했다.
다음 증인은 오리진라이프의 전 수석 상담사였다. 이름은 강민재였다. 그는 회사를 그만둔 뒤 내부 문건을 공개했고, 그 때문에 여러 소송을 겪고 있었다.
강민재는 증인석에 앉자마자 물을 마셨다. 그는 법정의 공기보다 자기 과거가 더 불편한 사람처럼 보였다.
한서윤이 물었다.
“증인은 원고 부모의 상담 과정에 참여했습니까?”
“네. 초기 상담 기록에 제 이름이 있습니다.”
“당시 오리진라이프는 질병 예방과 향상 항목을 어떻게 구분했습니까?”
강민재는 희미하게 웃었다.
“고객에게 설명할 때는 구분했습니다. 내부 판매 구조에서는 묶었습니다.”
“무슨 뜻입니까?”
“질병 위험 감소만으로는 수익성이 낮았습니다. 부모들은 이미 병을 막기 위해 큰돈을 지불할 준비가 되어 있었습니다. 회사는 그 순간을 확장했습니다. 병을 막을 수 있다면 고통도 줄일 수 있다. 고통을 줄일 수 있다면 스트레스 반응도 조절할 수 있다. 스트레스를 조절할 수 있다면 집중력도 개선할 수 있다. 집중력을 개선할 수 있다면 장래 직업 적응성도 높일 수 있다. 이런 식이었습니다.”
“상담 매뉴얼이 있었습니까?”
“있었습니다.”
한서윤은 자료를 화면에 띄웠다.
상담 지침 4-B.
보호 본능 활성화 구간.
1. 가족력 위험을 시각화한다.
2. 방치 가능성의 정서적 비용을 설명한다.
3. 기본 치료 패키지와 프리미엄 적응성 패키지를 연속선상에 배치한다.
4. 부모가 '선택하지 않을 경우의 책임'을 스스로 상상하게 한다.
법정 안에서 낮은 탄식이 흘렀다.
정 판사는 이번에도 나무망치를 두드리지 않았다.
한서윤이 물었다.
“‘방치 가능성의 정서적 비용’이란 무엇입니까?”
강민재는 화면을 보며 말했다.
“부모가 나중에 아이에게 들을 수 있는 말을 상상하게 하는 겁니다. 왜 예방할 수 있었는데 하지 않았느냐. 왜 더 나은 조건을 줄 수 있었는데 주지 않았느냐. 그런 질문입니다.”
한서윤이 다시 물었다.
“그러면 회사는 부모에게 개입하지 않을 책임을 느끼게 만들었습니까?”
“네.”
“향상 항목까지 포함해서요?”
“네.”
“원고 부모에게도 그런 방식이 사용되었습니까?”
강민재는 서류를 보았다.
“기록상 그렇습니다.”
피고 측 변호사가 일어섰다.
“증인은 현재 피고 회사와 분쟁 중입니다. 진술 신빙성에 문제가 있습니다.”
정 판사는 고개를 끄덕였다.
“신빙성 판단은 법원이 하겠습니다. 반대신문 하십시오.”
윤태겸이 앞으로 나왔다.
“증인, 유전자 편집 기술이 실제로 수많은 질병 위험을 낮춘 것은 사실입니까?”
“네.”
“원고 역시 그 혜택을 받았습니까?”
“자료상 그렇습니다.”
“그렇다면 오리진라이프가 제공한 서비스는 허위가 아니었습니다.”
강민재는 잠시 생각했다.
“허위가 아닌 상품도 사람을 속일 수 있습니다.”
윤태겸이 눈썹을 조금 올렸다.
“설명해 보시죠.”
강민재는 정면을 보았다.
“우리는 부모에게 거짓말하지 않았습니다. 더 위험한 일을 했습니다. 진실들을 순서대로 배열했습니다. 질병 위험은 줄일 수 있다. 스트레스 반응도 일부 조정할 수 있다. 집중 지속성도 예측 범위 안에서 개선할 수 있다. 각각의 문장은 거짓이 아니었습니다. 그 문장들을 한 줄로 이어붙이면 부모는 아이의 미래 전체가 책임 가능한 선택지처럼 보이기 시작합니다.”
그는 물컵을 만졌다.
“부모는 아이를 낳기도 전에 아이의 실패를 자기 책임으로 느끼게 됩니다. 회사는 그 불안을 상품 구성표로 바꿨습니다.”
이현은 그 말을 들으며 어린 시절의 어머니를 다시 떠올렸다. 비 오는 날 우산을 들고 학교 앞에 서 있던 모습. 감기에 걸린 밤 이마에 손을 얹던 모습. 그 모든 사랑이 어떻게 계약서의 연료가 되었는지 생각했다.
사랑은 시장의 반대편에 있지 않았다.
때로 사랑은 시장이 가장 잘 알아보는 불안이었다.
재판 셋째 날, 이현은 피고 측 반대신문을 받았다.
윤태겸은 아주 공손했다.
“박이현 씨, 원고는 현재 직장 생활을 하고 있습니까?”
“네.”
“직장에서 높은 평가를 받고 있습니까?”
“그런 편입니다.”
“건강 상태도 양호합니까?”
“네.”
“대인관계에 중대한 문제가 있습니까?”
“없습니다.”
“정신과 진단을 받은 적은 있습니까?”
“없습니다.”
“그렇다면 원고는 객관적으로 성공적인 삶을 살고 있습니다.”
한서윤이 일어섰다.
“평가적 표현입니다.”
정 판사가 말했다.
“질문 형태로 바꾸십시오.”
윤태겸이 고개를 숙였다.
“원고는 자신의 삶이 객관적으로 실패했다고 생각합니까?”
“생각하지 않습니다.”
“부모의 선택 덕분에 건강상 이익을 얻었다는 점은 인정합니까?”
“인정합니다.”
“그렇다면 원고의 소송은 건강상 이익을 얻은 사람이 그 이익의 조건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제기한 소송입니까?”
법정이 조용해졌다.
이현은 그 질문을 예상했다. 여러 번 연습한 질문이었다. 그는 준비한 답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막상 질문이 법정에서 울리자, 그 답은 너무 작게 느껴졌다.
그는 잠시 침묵했다.
“제가 문제 삼는 건 이익이 아닙니다.”
“그럼 무엇입니까?”
“이익이라는 이름으로 제 미래 목소리가 미리 사용된 방식입니다.”
윤태겸은 미세하게 웃었다.
“태어나기 전의 아이는 목소리가 없습니다.”
“그래서 더 조심해야 했습니다.”
“누가 조심해야 했습니까? 부모입니까? 의사입니까? 회사입니까? 사회 전체입니까?”
“모두입니다.”
“그렇다면 아무도 결정하지 말아야 합니까? 부모는 아이가 태어나기 전 아무 의료적 판단도 하지 말아야 합니까?”
“부모는 판단해야 합니다.”
“그런데 이 사건의 부모가 판단한 것은 문제라는 뜻입니까?”
이현은 윤태겸을 바라보았다.
“부모가 아이를 살리기 위해 판단하는 순간과, 아이가 어떤 사람이 되어야 하는지 사양을 정하는 순간은 다릅니다.”
윤태겸은 즉시 물었다.
“그 경계는 누가 정합니까?”
이현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 질문은 피고 측의 가장 강한 질문이었다. 치료와 향상의 경계는 늘 흔들렸다. 질병 위험 감소와 삶의 질 향상은 실제 의료 현장에서 자주 겹쳤다. 불안장애 위험을 줄이는 개입은 치료인가 향상인가. 충동 조절을 완화하는 조정은 보호인가 성격 설계인가. 수면 리듬을 안정화하는 일은 질병 예방인가 노동 효율 최적화인가.
정답은 없었다.
그래서 법정이 필요했다.
이현은 천천히 말했다.
“그 경계를 오늘 이 법정이 처음으로 그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윤태겸이 물었다.
“그 경계가 잘못 그어지면, 미래 아이들은 예방 가능한 질병을 안고 태어날 수 있습니다.”
“그 경계가 사라지면, 미래 아이들은 부모와 회사가 합의한 목적을 몸에 안고 태어날 수 있습니다.”
윤태겸은 잠시 말을 멈췄다.
그날 저녁, 이현은 집으로 돌아와 계약서 사본을 다시 펼쳤다. 종이 냄새는 거의 사라져 있었다. 그는 침대 위에 앉아 조항들을 하나씩 읽었다.
제12조. 결과의 예측 가능성.
본 서비스는 유전적·발생학적·환경적 변수에 의해 결과가 달라질 수 있으며, 피고 회사는 특정 인격, 성격, 직업적 성취를 보장하지 않는다.
회사는 아무것도 보장하지 않았다.
그러나 아무것도 보장하지 않는 방식으로 너무 많은 것을 팔았다.
제17조. 법정대리인의 동의.
계약자는 장래 출생할 자의 최선의 이익을 고려하여 본 계약을 체결하며, 계약자는 본 서비스의 성격, 위험, 기대 효과, 대안적 선택 가능성에 관해 충분한 설명을 들었음을 확인한다.
그는 그 조항 옆에 아버지의 서명이 있는 것을 보았다.
박준호.
아버지의 글씨는 늘 단정했다. 세금 신고서, 학교 제출 서류, 통장 비밀번호 메모, 병원 동의서. 모든 곳에서 같은 글씨였다.
어릴 때 그는 아버지의 서명을 멋있다고 생각했다. 자기 이름을 그렇게 빠르고 흔들림 없이 쓸 수 있는 어른이 되고 싶었다.
이제 그는 그 서명이 자기보다 먼저 도착했다는 사실을 알았다.
그는 태어나기 전부터 아버지의 글씨 아래 있었다.
전화가 울렸다.
어머니였다.
그는 한참 동안 화면을 보다가 받았다.
“여보세요.”
어머니는 바로 말하지 않았다. 수화기 너머에서 물 끓는 소리가 들렸다. 아주 오래된 저녁처럼 느껴지는 소리였다.
“밥은 먹었니?”
이현은 눈을 감았다.
“먹었어요.”
거짓말이었다. 어머니도 아마 알았을 것이다.
“오늘 네가 한 말 들었다.”
“네.”
“네 얼굴이 계약서처럼 보인다는 말.”
이현은 대답하지 못했다.
어머니는 조용히 말했다.
“엄마는 네 얼굴을 처음 봤을 때 그런 생각 안 했어.”
“알아요.”
“정말이야. 병원에서 네가 울었고, 간호사가 너를 내 가슴 위에 올려줬어. 그때 나는 네 눈이 어떻게 조정됐는지, 심장이 얼마나 건강할지, 그런 생각 하나도 못 했어. 그냥 네가 너무 작고 뜨거웠어.”
이현은 수화기를 귀에 더 가까이 댔다.
“엄마는 그날 계약을 잊었어. 네가 태어난 날에는 정말 잊었어.”
그 말은 위로가 되지 않았다. 그렇다고 상처도 아니었다. 그것은 사실에 가까운 무언가였다.
“그럼 왜 말 안 했어요?”
“무서웠어.”
“제가 화낼까 봐요?”
“네가 우리 사랑까지 의심할까 봐.”
이현은 창밖을 보았다. 건너편 아파트 창문들에 불이 켜져 있었다. 수많은 집 안에서 부모와 아이들이 저녁을 먹고 있을 것이다. 어떤 부모는 아이의 숙제를 봐주고, 어떤 부모는 아이에게 소리를 지르고, 어떤 아이는 방문을 닫고, 어떤 아이는 몰래 울고 있을 것이다.
그 모든 집에도 보이지 않는 계약들이 있을 것이다.
학교 선택, 언어, 계급, 종교, 음식, 기대, 실패의 허용 범위.
그의 계약이 특별한 이유는 종이에 적혀 있고, 세포에 남았다는 점이었다.
“의심한 적 있어요.”
그가 말했다.
어머니는 숨을 멈춘 듯했다.
“그런데 사랑을 의심한 건 아니에요.”
“그럼 뭘 의심했니?”
“사랑이 어디까지 대신 서명할 수 있는지요.”
수화기 너머에서 어머니가 울기 시작했다. 그는 그 울음을 들으며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예전 같으면 달래려고 했을 것이다. 괜찮다고 말했을 것이다. 그러나 오늘 그는 그 말을 하지 않았다.
괜찮다는 말은 너무 많은 것을 덮었다.
판결 선고일에는 비가 왔다.
법원 앞에는 우산들이 낮게 떠 있었다. 기자들은 투명 비닐로 카메라를 감쌌고, 시민단체 사람들은 젖은 손팻말을 들고 있었다. 이현은 우산 없이 법정으로 들어갔다. 머리카락과 어깨가 젖었다. 한서윤은 그를 보고 손수건을 내밀었지만, 그는 받지 않았다.
법정 안은 첫날보다 더 조용했다.
정 판사가 판결문을 들고 들어왔다. 모두 일어섰다. 그가 자리에 앉자 사람들도 앉았다.
“주문을 선고합니다.”
정 판사의 목소리는 차분했다.
“피고 오리진라이프 주식회사는 원고 박이현의 현재 인격, 성향, 신체 조건, 사회적 적응성을 피고 회사의 계약상 서비스 결과로 표시하거나 홍보해서는 안 된다.”
방청석이 움직였다.
“원고의 부모와 피고 회사 사이에 체결된 유전체 편집 계약은 원고의 생명 보존과 중대한 질병 위험 감소를 위한 범위에서 제한적으로 법적 효력을 가진다. 위 계약 중 원고의 장래 성격, 정서 반응, 외모, 사회적 경쟁력, 직업적 적응성을 목적으로 한 조항은 원고에게 대항할 수 없다.”
이현은 손을 무릎 위에 올려놓았다.
“피고 회사는 원고에게 위자료를 지급하라. 나머지 청구는 기각한다.”
기자들이 빠르게 메모했다.
정 판사는 판결 이유를 읽기 시작했다.
“인간은 누구나 자신이 선택하지 않은 조건 속에서 태어난다. 부모, 언어, 국적, 계급, 유전적 조건, 시대적 환경은 출생 이전부터 개인의 삶을 형성한다. 법은 이 모든 조건을 사후적으로 무효화할 수 없다. 이 사건 원고 역시 편집 이전의 신체로 돌아갈 수 없고, 법원은 존재하지 않았던 원상을 회복시킬 수 없다.”
그는 페이지를 넘겼다.
“그러나 원상회복의 불가능성이 권리 침해 판단의 불가능성을 뜻하지는 않는다. 어떤 침해는 되돌릴 수 없기 때문에 더욱 신중히 판단되어야 한다.”
이현은 그 문장을 들으며 눈을 감았다.
“부모의 대리권은 아이가 스스로 결정할 수 없는 시기에 필요하다. 그 대리권은 생명 보존, 중대한 질병 예방, 회복 불가능한 고통의 방지 영역에서 강하게 인정된다. 부모는 아직 말할 수 없는 아이를 위해 결정할 수 있다. 이 대리권은 아이의 미래를 열어두기 위한 임시 권한이다.”
정 판사는 잠시 멈췄다가 계속 읽었다.
“그 권한은 아이가 어떤 종류의 사람이 되어야 하는지 확정하는 순간 약화된다. 감정 반응, 성향, 외모, 경쟁력, 사회적 선호도, 직업 적응성은 단순한 질병 위험과 같은 방식으로 다룰 수 없다. 이 영역에서 부모의 선택은 보호를 넘어 설계에 접근한다. 설계는 아이의 열린 미래를 타인의 목적 아래 배치할 위험을 가진다.”
법정은 숨소리까지 들릴 만큼 조용했다.
“이 사건에서 피고 회사는 부모의 보호 본능과 장래 책임 불안을 결합하여 치료와 향상을 하나의 상품 패키지로 제공했다. 그 결과 부모의 동의는 장래 출생할 아이의 최선의 이익을 추정하는 임시 장치에서, 아이의 장래 자기결정권을 선점하는 형식으로 확대되었다.”
이현은 그 말을 들었다.
동의의 선점.
그 문장은 더 이상 그의 내면에만 있지 않았다. 법원 기록에 들어갔다.
“원고는 계약의 당사자가 아니었다. 동시에 계약의 실행 장소였다. 원고는 계약의 수익자일 수 있다. 동시에 계약의 피해자일 수 있다. 법은 이 두 지위를 서로 배척되는 것으로 볼 수 없다. 어떤 이익은 손해를 동반할 수 있고, 어떤 보호는 장래 자유의 범위를 축소할 수 있다.”
정 판사는 마지막 장을 넘겼다.
“따라서 이 법원은 피고 회사와 부모 사이의 계약 자체를 전면 무효로 돌리지 않는다. 그 계약은 원고의 생명 보존과 중대한 질병 위험 감소라는 제한된 목적 안에서만 사후적 정당성을 가진다. 향상과 적응성 설계를 목적으로 한 조항은 원고의 인격 전체를 정당화하는 문서가 될 수 없다. 원고는 자신이 어떤 계약의 결과로 태어났다는 사실을 알 권리가 있다. 또한 그 계약이 자신의 삶을 끝까지 해석하지 못하게 할 권리가 있다.”
정 판사는 고개를 들었다.
“이 사건은 계약의 무효 확인 소송으로 출발했으나, 실질적으로는 기원에 붙은 타인의 서명이 현재 인격에 대해 어디까지 권위를 주장할 수 있는지에 관한 소송이다. 법은 그 서명을 완전히 지울 수 없다. 다만 그 서명이 한 인간의 삶 전체를 대신 읽는 것을 금지할 수 있다.”
그는 판결문을 내려놓았다.
“선고를 마칩니다.”
나무망치 소리는 없었다.
사람들이 일어섰다. 기자들이 밖으로 달려나갔다. 피고 측 변호사는 법무팀장과 낮은 목소리로 항소 가능성을 이야기했다. 한서윤은 이현을 향해 돌아섰다.
“이겼다고 말하기는 복잡하지만, 중요한 선고입니다.”
이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네.”
부모는 방청석에 그대로 앉아 있었다. 어머니는 울고 있었고, 아버지는 판결문이 놓인 방향을 바라보고 있었다. 이현은 한참 망설이다가 그들에게 다가갔다.
아버지가 먼저 일어섰다.
그는 무슨 말을 하려는 듯 입을 열었다가 닫았다. 이현은 아버지의 손을 보았다. 그 손은 계약서에 서명했던 손이었다. 동시에 어린 이현의 자전거 뒤를 붙잡고 뛰던 손이었다. 열이 오르는 밤 물수건을 갈아주던 손이었다. 대학 합격 발표 날 말없이 등을 두드리던 손이었다.
한 손에 여러 시간이 겹쳐 있었다.
아버지가 말했다.
“미안하다.”
그 말은 너무 작았다.
어머니가 뒤이어 말했다.
“우리는 너를 위해 했어.”
예전 같으면 그 문장은 이현을 무너뜨렸을 것이다. 오늘은 이상하게도 그렇지 않았다. 판결문이 그 문장의 권한을 조금 줄여주었기 때문일지도 몰랐다.
이현은 어머니를 보았다.
“알아요.”
어머니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그런데 그 말로 전부 설명되지는 않아요.”
어머니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알아.”
세 사람은 법정 뒤편에 잠시 서 있었다. 누구도 서로를 안지 않았다. 아직 그럴 수 없었다. 포옹은 너무 빠른 결론처럼 느껴졌다. 그들은 대신 같은 공간 안에 있었다. 그 정도가 그날 가능한 화해의 전부였다.
법원을 나서자 비가 그쳐 있었다.
기자들이 몰려왔다.
“박이현 씨, 판결에 만족하십니까?”
“피고 회사가 항소하면 어떻게 대응하실 겁니까?”
“부모님을 용서하신 겁니까?”
“유전자 편집 기술 자체에 반대하십니까?”
그는 잠시 멈춰 섰다. 마이크들이 얼굴 가까이 다가왔다. 그는 자기 얼굴을 비추는 수십 개의 렌즈를 보았다. 렌즈 속의 얼굴은 대칭적이고, 피로에도 무너지지 않았고, 화면에 잘 잡혔다.
계약서가 좋아할 얼굴이었다.
그는 말했다.
“저는 제가 태어나기 전에 어떤 계약이 있었다는 사실을 지울 수 없습니다.”
기자들이 받아 적었다.
“그 계약 덕분에 제가 살아 있을 수도 있습니다. 그 계약 때문에 제가 제 삶을 의심하게 된 것도 사실입니다. 오늘 판결은 그 둘 중 하나만 고르라고 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숨을 골랐다.
“저는 부모님의 사랑을 무효로 만들고 싶지 않습니다. 회사의 계약이 제 삶을 끝까지 설명하는 것도 원하지 않습니다.”
한 기자가 물었다.
“그럼 오늘 얻은 권리는 무엇입니까?”
이현은 법원 계단 아래를 보았다. 빗물이 작은 웅덩이에 고여 있었고, 그 안에 흐린 하늘과 법원 건물이 함께 비쳤다. 그는 웅덩이 속 자기 얼굴을 보았다. 물결 때문에 얼굴은 계속 흔들렸다. 조정된 비율도, 유전적 확률도, 의료 기록도 그 흔들림을 고정하지 못했다.
그는 대답했다.
“제 기원을 인정하되, 그 기원이 저를 대신 말하지 못하게 할 권리입니다.”
기자들이 다시 질문을 던졌다. 그는 더 대답하지 않았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그는 계약서 사본을 다시 꺼냈다. 택시 뒷좌석은 조용했고, 창밖의 도시는 비 온 뒤의 냄새를 풍겼다. 그는 서류 첫 장을 펼쳤다. 제목 아래 부모의 서명이 있었다. 그 아래 회사의 직인이 있었다. 한때 그 문서들은 그보다 먼저 존재한 운명처럼 보였다.
그는 주머니에서 펜을 꺼냈다.
계약서를 찢지는 않았다.
서명 위에 선을 긋지도 않았다.
그는 첫 장의 빈 여백에 자기 이름을 썼다.
박이현.
열람함.
해석권 불인정.
그 글씨는 아버지의 글씨와 닮지 않았다. 어머니의 글씨와도 닮지 않았다. 그리 아름답지도 않았다. 약간 기울었고, 마지막 획은 흔들렸다.
그는 그 흔들림이 마음에 들었다.
집에 도착한 뒤 그는 거울 앞에 섰다. 얼굴은 그대로였다. 광대뼈의 각도도, 턱선도, 눈 사이 거리도 달라지지 않았다. 판결은 그의 몸을 바꾸지 않았다. 세포들은 여전히 오래전의 개입을 기억하고 있을 것이다. 심장은 여전히 안정적으로 뛰었고, 집중력은 아마 내일도 좋을 것이다.
그는 거울 속의 얼굴을 한참 보았다.
처음으로 그 얼굴이 계약서와 조금 멀어져 보였다.
완전히 그의 것이 된 것은 아니었다. 그런 순간은 쉽게 오지 않을 것이다. 어쩌면 끝내 오지 않을지도 모른다. 인간은 누구나 자기 기원을 완전히 소유하지 못한다. 부모의 욕망, 시대의 공기, 병원의 기술, 시장의 언어, 우연히 살아남은 세포들이 한 사람의 시작을 함께 만든다.
그날 밤 이현은 오래 집중하지 않았다.
일을 하지 않았고, 판결문도 다시 읽지 않았다. 그는 불을 끄고 침대에 누웠다. 잠이 바로 오지 않았다. 수면 리듬은 안정적이어야 했지만, 그날은 조금 어긋났다.
그는 그 어긋남을 반가워했다.
새벽 가까이 되어서야 잠이 들었다.
꿈속에서 그는 다시 법정에 서 있었다. 판사는 없었고, 변호사도 없었고, 부모도 없었다. 긴 책상 위에 계약서가 놓여 있었다. 계약서는 스스로 페이지를 넘겼다. 질병 위험 감소, 충동성 조절, 수면 패턴 안정화, 얼굴 비율 조정, 직업 적응성 향상 가능성.
마지막 장은 비어 있었다.
그는 그 빈 장 앞에 앉았다. 누군가 이미 서명했을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아무 글씨도 없었다.
그는 펜을 들었다.
무엇을 쓸지 오래 생각했다.
그리고 아주 천천히 첫 문장을 적었다.
나는 계약의 결과로 태어났다.
그는 잠시 멈췄다.
다음 문장을 썼다.
그 사실은 내 삶의 시작을 설명한다.
다시 멈췄다.
세 번째 문장을 썼다.
끝은 아니다.